카테고리 없음

[말씀묵상] 계획보다 순종이 우선이다(히브리서11:8-12)

ML.chang 2019. 7. 11. 07:00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것입니다.
  It was by faith that Abraham obeyed when God called him to leave home and go to another land that God would give him as his inheritance. He went without knowing where he was going.

히 11: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믿음으로 그는 마치 타국에서와 같이 약속의 땅에서 거류하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And even when he reached the land God promised him, he lived there by faith--for he was like a foreigner, living in a tent. And so did Isaac and Jacob, to whom God gave the same promise.

히 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Abraham did this because he was confidently looking forward to a city with eternal foundations, a city designed and built by God.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믿음으로 g사라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약속해 주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g.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비록 그는 늙고 그이 아내 사라 역시 단산하였지만, 믿음으로 그는 생식의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그(아브라함)가. . .)
 It was by faith that Sarah together with Abraham was able to have a child, even though they were too old and Sarah was barren. Abraham believed that God would keep his promise.

히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그래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또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는 자손들이 태어났습니다.
 And so a whole nation came from this one man, Abraham, who was too old to have any children--a nation with so many people that, like the stars of the sky and the sand on the seashore, there is no way to count them.

계획보다 순종이 우선이다 

히브리서 11장 8-12절'

철새들은 때가 되면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날아갑니다.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약 1,200km 이상이 되는 굉장히 긴 코스를 쉬지 않고 날아가는데 자기들이 머물러야 할 곳을 정확하게 잘 찾아갑니다. 요즘 자동차에는 네비게이션이 달려 있지만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길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연초가 되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방향을 잡는 때입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이 길로 가면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미래의 전망들을 많이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점쟁이를 찾아가고 토종비결을 찾고 내가 어떻게 해야 내가 원하는 지점에 갈 수 있을지 미래에 대한 염려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요? 길을 잃지 않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 그 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처음 부름을 받을 때 첫 번째 하나님의 메시지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입니다. 보여 준 땅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에서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특이한 것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데 목적지를 말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특징은 6하 원칙이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무엇을, 얼마나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에서 항상 부담스러운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확실한 것을 보장받고 떠나고 싶은데 확실한 것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이게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의 출발지점에서는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배운 방식과는 정반대입니다. 대체로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시작하려고 하면 뭔가를 다 따져보고 확인하고 점검하고 분명해야 출발합니다. 목적지도 분명하지 않고 지도도 없는데 길을 떠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길은 불확실한 출발을 합니다. 믿음의 삶이란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확신한 것만을 원한다면 믿음의 길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 확실한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가겠습니다.”라고 하면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삶은 선택하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불확실해 집니다. 확실한 것은 딱 하나,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부르신 분이 중요합니다. 누가 떠나라고 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제 3자의 관점에서 보면 믿음의 길은 무모하고 위험해 보입니다. 믿음은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이가 75세 였습니다. 안정된 삶을 살아야 될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순종합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당시의 문화에서 부족을 떠난다는 것은 미래는 물론이고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은 장막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옮겨 다니는 유목민의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에는 모두가 정착을 하고 살았는데 아브라함은 유목민의 삶을 선택한 겁니다. 유목민의 삶의 특징은 떠나는 삶입니다.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유목민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신유목민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국경을 쉽게 넘나들고 유학생들도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태어난 곳을 떠납니다. 또 글로벌 기업에 들어가면 국적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태어난 곳에서 살지 않고 끊임없이 이주해가는 현대의 젊은이들은 신유목민입니다. 역사를 더듬어보면 유목민이 농경민보다 우월했습니다. 정착을 하는 순간부터 야성이 사라져 버립니다. 믿음의 삶은 정착민보다 유목민의 삶과 비슷합니다. 믿음의 삶은 안정된 삶을 거부하고 불안정한 삶으로 떠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삶은 닫힌 구조에서의 삶에서가 아닌 열린 구조로 이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닫힌 사회 속의 삶은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린사회로 나가려고 하면 자기가 살던 삶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옵니다. 두려움은 외부세계와 단절을 만들고 결국은 성을 쌓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인은 성을 처음으로 쌓은 사람입니다. 가인이 성을 쌓은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성을 쌓는 문화는 문명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닫힌 세계는 삶의 안정감이 최고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믿음의 삶과 거리가 멀어집니다. 자기의 힘으로 성을 높이 쌓아 갈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인류 최초의 바벨탑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을 쌓은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성을 무너뜨려 버리셨습니다. 

믿음의 삶은 닫힌 구조가 아니라 열린 구조를 지향합니다. 요즘은 모든 것이 다 열려있는 세상입니다. 교통, 통신이 고도로 발달해 있습니다. 또 인터넷을 통해서 세상이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닫힌 구조에서 열린 구조의 삶으로 이끌어 냅니다. 믿음의 삶은 멀리 보고, 넓게 보게 합니다. 우리의 시야의 폭을 넓혀줍니다. 하나님은 부족 안에 갇혀 있던 한 사람을 이끌어 내어서 모든 민족의 복의 통로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자기의 부족에 갇혀 살았다면 그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불러내신 이유는 뭘까요?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하여 부족의 삶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 통로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이 유목민적인 삶, 자기의 안정된 삶을 나가 열린 세계로 나아가는 이 삶이 바로 선교적 삶입니다. 믿음의 삶은 선교적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선교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선교적 삶은 유목민적 삶입니다.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약간 불안정한 삶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끊임없이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떠남의 영성을 갖고 있어야 우리의 믿음이 건강해지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란이나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작은 정착촌에 머물러 있는 한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도록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올해도 어떤 안정된 삶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두렵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반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이끌어 내셔서 더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우리를 불러 주실 줄 믿습니다. 믿음의 삶을 살려면 떠남에 대한 두려움과 맞서야 됩니다.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하면 당장 우리 안에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과 부딪히고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 두려움과 맞서야 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 나아간다는 것은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큰 강적은 두려움입니다. 아이디어가 있어도 두려움이 있으면 못하는 겁니다. 아이디어나 지식, 정보의 싸움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아이디어도 있고 정보도 있고 지식도 많은데 두려움이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보면 엘라 골짜기에서 대치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한가운데서 날만 새면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이 쩌렁쩌렁한 소리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도전을 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 안에 있는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들어와 보니까 골리앗이 하나님을 욕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에 대한 정보도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실패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런 것도 고민하지 않고 신속하게 물맷돌을 들고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다윗에게는 순종하는 행동만 보입니다. 

믿음의 삶은 단순합니다. 너무 멀리 생각하면 안 됩니다. 너무 멀리 생각하면 복잡해집니다. 따지기만 하다 보면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의논도 너무 많이 하면 안 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얘기를 너무 듣다 보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한 번에 한 걸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옮겨 나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앞의 6장 33절의 말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33절 말씀의 삶을 살려면 34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려면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아야 됩니다. 매일 우리가 승리하는 비결은 내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라는 겁니다. 오늘로는 오늘 족합니다. 너무 멀리 생각하고, 염려하고, 고민하지 말라는 겁니다. 염려가 너무 많은 이유는 너무 많이, 너무 멀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단순합니다.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하루, 믿음으로 한발자국 옮겨 나가는 순종을 하면 그게 믿음의 삶입니다. 계획을 너무 많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니엘 핑크라는 미래학자의 <새로운 미래가 온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한국에 왔을 때 기자들이 한국 젊은이들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는 “계획을 너무 세우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미래학자가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말은 특이한 조언입니다. 숨은 뜻은 세상은 너무도 복잡할 뿐만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모든 것은 나의 예상을 벗어나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내가 계획 세운 것은 다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계획을 세우는 일 대신에 멋진 실수를 해보라”고 주문합니다. 어리석은 실수는 반복해서는 안 되지만 실수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조금씩 배워가면서 자신이 조금씩 성장해 가는 것이 미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많은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 속에서 실수를 하면서 조금씩 배워 가면서 성장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일입니다. 믿음의 삶과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었습니다. 

본문 10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입니다. 누가 계획한다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획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그 길은 자기가 계획해서 걸어간 것이 아닌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그 순종의 삶이 아브라함의 인생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계획 세우다가 볼 일 다 보는데 지금까지 내가 계획했던 대로 걸어온 분이 있습니까? 계획한 대로 되었습니까? 계획 세우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대로 되었습니까? 저만 봐도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더 크신 분의 계획이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9장 21절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인생을 계획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우리가 계획을 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워합니다. 그러나 그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해야 합니다. 우리가 언뜻 보기에는 하나님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완전합니다. 계획을 세우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계획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에 몰두해야 합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이미 계획되어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짠 계획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메시지가 아주 선명합니다. 그가 자기의 머리를 굴리고 자신의 계획과 방법에 충실했던 순간은 최악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면 기가 막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최악의 사건은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입니다. 자기의 아내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씨를 줄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자기의 머리를 굴리고 변수를 썼습니다. 역사에 불운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을 제단에 바치라는 말도 안 되고, 설명서 하나도 붙지 않은 명령 앞에 무조건 제단에 올려 바치고 순종만 했더니 거기에서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축복,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창세기 22장에 나타납니다. 우리의 생각이 너무 많고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면 믿음의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순종의 삶을 익히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마다 우리의 이성과 쌓아온 경험들이 가로막습니다. 기독교는 이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상식을 존중합니다. 경험의 세계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성과 경험보다 말씀이 더 우선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정보를 분석하고 순종하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더 많이 알려고 하는 태도보다 더 순종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삶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의 벽을 뛰어 넘게 합니다. 자신의 이성과 경험의 세계 안에서 믿음 생활을 하려고 하면 힘이 듭니다.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펼쳐집니다. 무엇인가 세상에서 우리가 배운 것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때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길은 세상의 방식과 계산으로 맞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방식과 세상이 제시하는 방식이 달라야 그게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믿음으로 하루하루 순종하면 우리의 경험의 세계를 벗어난 놀라운 결과가 열립니다. 아무 소망이 없었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허다한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게 된 이 놀라운 출발점은 상식과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할 때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을 통해서 확실히 우리에게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삶이란 계획은 없고 그냥 순종하는 겁니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불확실한 현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은 불투명했지만 갈수록 비전이 점점 더 선명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보았던 그 비전이 뭡니까? 우리가 비전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성경을 보면 가장 확실한 비전은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5장 1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여기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라는 이 환상이 다른 말로 비전입니다. 아브라함이 본 비전은 무엇일까요? “나는 네 방패요 너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라함이 보았던 환상은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 속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방패를 찾고 있었습니다. 깊은 상실 속에서 어떤 위로와 보상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상과 비전은 하나님 당신이었습니다. 비전은 하나님입니다. 신자가 길을 잃을 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보이기만 하면 길을 잃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이스마엘을 낳고 난 이후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입니다. 삶의 혼란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혼란과 두려움은 비전을 보지 못할 때 일어나는 것인데 그 비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 때문에 우리의 시선에 하나님만 놓치지 않으면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분이 책임져 주십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가 청중들을 향해 설교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3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행7:2-3)”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기 전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졌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고향과 친척과 모든 것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영광의 하나님이 먼저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아브라함이 확실하게 본 것은 영광의 하나님, 비전입니다. 

신자가 보아야 할 최고의 비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갈 수가 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알아가야 할 레슨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보장도 아닙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4주간의 특새를 하면서 기도 응답이나 내 삶의 어떤 환경의 역전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가운데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배워가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어떤 일이든지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겁니다. 그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하나님이 선명하게 우리의 삶에 보인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한 순간 순간 걸어가면 그 길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길이 됩니다. 지금까지 찾고 있는 비전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더 확실해지기를 원합니까?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미래를 연구해도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연말이 되면 미래에 대한 책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합니다. 아무리 읽어도 “미래는 모르겠다.”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삶을 아무리 연구하고, 고민을 하고, 계획을 해도 우리의 미래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갈수록 삶은 불확실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한 건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늘 불확실하고 위험한 길 위에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불확실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도 하시고 명령도 하시지만 구체적인 설명서는 없습니다. 결론을 툭 던져 놓으시고 시종일관 우리의 순종에 주목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초기에 실수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을 점점 선명하게 봅니다. 처음에는 아주 희미하게 하나님이 보였다가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믿음의 길에서 때로는 혼란한 상황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믿음을 선택하는 순간에 삶의 근거가 흔들리고 모든 것이 요동을 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답을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지도를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묻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의 이정표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붙들어야 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누가 확실한 것을 보여 주겠다고 하면 속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에 확실한 것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만 확실합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괜히 확실하지 않는 것을 확실하게 하겠다고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오늘 하루 즐거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 어떤 특별한 보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을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가능성을 믿고 살지 마십시오. 그건 신기루입니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고 가능성을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모든 것을 걸고 산다는 것은 불확실한 삶입니다. 믿음의 삶은 불확실해 보이지만 가장 확실한 삶입니다. 우리의 가능성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어떤 상황을 믿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조건이나 상황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평가하는 중요한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주 단순한 구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 말에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어떤 다른 것을 믿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다른 단계로 나아가는 하나의 출발점이 이 구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믿었습니다. 확실한 미래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현재도 미래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미래가 불안하십니까? 불안하다면 왜 불안할까요? 미래를 위해서 뭔가 준비되지 않은 것이 불안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내 삶을 온전히 맡기지 못해서 불안한 것입니다. 우리의 지금 형편도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믿음의 눈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면 두려움 없이 용기 있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길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면 그 순간 우리는 길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이고, 믿음을 가졌다면 두려움 없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의 길을 나서라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가 해야 할 많은 계획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내 삶에 주어지는 말씀에 대해 내가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에 대한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흔들림 없는 미래를 위한 준비입니다. 가장 확실한 삶은 말씀에 단순히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 주어진 말씀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걸어가는 삶보다 더 확실한 미래를 위한 준비는 없습니다. 어떤 해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순종하는 게 미래가 됩니다. 순종이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삶입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하고, 지금 맡겨진 어떤 일에 하나님이 충성하라면 그냥 충성하면 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대해서 아주 단순하게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내 인생의 미래가 됩니다. 

우리의 삶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생각하고 너무 멀리 너무 많이 생각하니까 복잡한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 앞에 한 걸음 순종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따라 계속 걸어가고 걸어가다 보면 그 삶이 내 인생의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에 구체적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옮기면 그것이 내 인생의 미래가 될 줄로 믿습니다. 가장 확실한 미래가 내 삶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순종한 것이 축복이 됩니다. 순종한 것이 내 미래가 됩니다. 멈춰 서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속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의 약속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동사형으로 움직였던 것처럼 미래에 대한 계획보다 매일의 순종의 삶을 통하여 끊임없이 움직이고 또 움직이는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놀라운 일들을 행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안정된 현실이 아니라 영원히 견고하신 하나님! 그분만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뚜벅뚜벅 매일 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순종이 미래입니다. 순종이 비전입니다. 순종이 여러분들에게 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머리를 단순화 시키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순종함으로 여러분의 인생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한 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