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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전부터 예비된 구원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오가의 주제가 뭐였죠. 초막절에 수전절 대중 설교를 하셨다라고 하는 그 내용과 오늘 많이 연관되어 있는 내용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언의 강론을 하시는 그런 부분이시기 때문에
지금 사순절 기간 중에 또 마침 이 본문을 우리가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스럽고요 이걸 우리가 조금 더 자세하게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개월 동안 여단 동편의 베레아 사역을 감당하시고 그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것 기억하시죠
그리고 나기 새끼를 타고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월요일날 뭘 했다고 그랬죠 예수님께서 월요일날 하신 일이 뭐예요.
성전 청결 그렇죠 화요일날은 뭐였죠.
모아가 나무를 조주했던 그런 사건과 신앙 논쟁을 했던 사건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우리가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죠.
화 있을진저 이 뱀더라 독사의 새끼들아 이렇게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제 신앙 논쟁을 하고
또 사단의 자식이다라고 이렇게 저주를 하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암탉이 새끼를 다 모으고 있는 것 같이 인자도 주의 사람들을 다 모으려 했으나 이 집이 황폐하여 버려질 것 같다라고 이야기를 하시죠 그래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이여 하시기까지 너희가 보지 못할 것이고 또 이제는 이후의 재림이 너희에게 오실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성전에서 나오시면서 뭔가 암탉을 이렇게 모이를 자녀를 이렇게 끌어안은 것 같은 그런 마음으로 일단 들어가셨지만
그들의 완악함을 보시고 나서 다시 나오시죠 나오실 때는 이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듯 그렇게 나오셨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신학자들을 케이유를 시키고 그리고 나오시죠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아마 어깨가 좀 으쓱해지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완전한 신학적인 주제로
주변에 있는 많은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 사람들을 ko 시켰기 때문에 굉장히 좋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나오면서 제자들이 이 성전이 너무 멋있어 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께 그렇죠 예수님 저 성전 너무나 멋있지 않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한 말씀 하시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 상황을 놓고 본다면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내용이 얼마나 의미 있는 내용이었는지 우리가 잘 알 수가 있겠죠.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오늘 화요일 감남산 이제 강론을 펼치십니다.
우리 제목 한번 읽어볼게요 81쪽 시작 제자들에게는 유언 강농 감다포를 남기신 후 십자가에 처형되시다 오늘의 포인트 한번 읽어볼게요
1번 갑란삼 강론 이 강론이라고 하기도 하고요 강화라고 하기도 하고 강설 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르침이라고 하기도 해요. 이렇게 여러분 이해하셨으면 좋을 것 같아요.
두 번째는 다락방 강금 두 번째는 포도나무 강건 네 번째는
각론을 마무리하는 대제사상적 기도 다섯 번째는 십자가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내려가신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번 읽어볼까요. 차고 정제가 81쪽 스카시테이프 그 내용 한번 굉장히 긴 내용이지만
읽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지난주까지는 대중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공적으로 증명하셨음을 공부했습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서 매듭을 탁 지으셨습니다.
유야무야 흐릿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시더니 이제는 제자들에게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봅니다.
오늘은 그것을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 마무리할 때 했던 얘기 강남삼에서 하신 긴 강민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잡히시던 날 밤 다락방에서 또 포도나무 밭을 지나심하신 유명한 강론들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유언 강론이지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따로 비밀스럽게 하신 말씀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도 유가에 따로 구분해 놓은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 맞습니까 들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 강론들은 아무에게나 들리지 않습니다.
아직 대중 속에 앉아 있다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 동안 일어난 일을
함께 시뮬레이션 하면서 경험하셔야 들립니다.
유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경험한 것은 그 사람을 이끌어가는 힘이 됩니다.
적극적으로는 선한 영향력이 되고 소극적으로는 나쁜 영향력이 되어 힘들게 합니다.
경험한 일이 그 사람을 지배합니다. 평생을 따라다닙니다.
지울 수 없습니다. 차곡차곡 쌓인 경험에 의해 생각하고 경험에 의해 판단합니다.
그 경험은 남은 인생을 가게 하는 엔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사건도 일단은 경험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무조건 믿는 것 출발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시작입니다.
힘이 없는 믿음일 수 있습니다. 경험해야 합니다.
자초지종 어떻게 되어 왔다는 건지 성경이 말하는 바를 경험해야 합니다.
역사 예수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분에게 그 일이 일어날 때 거기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분이 그 말씀을 하실 때 무슨 생각 때문에서 그렇게 하셨는지까지 뚫고 들어가야 합니다.
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알라는 뜻 아닙니까
하나님은 아무 내용도 없는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그냥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 3년 동안 하신 일 말씀 고내 사건 관계 갈등 등을 할 수 있으면 현장에 갇혀 있던 사람처럼 일단 원천 경험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분 스스로 하신 말씀을 가감하지 않은 채
원본 그대로 우리 지성 속에 의식하듯이 뿌리채 옮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실 그때는 이해하라고 하신 것인데 이해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하신 말씀이 이해되어야 그다음 우리 입장도 생기는 겁니다.
믿음도 생기고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아니라면 왜 하나님께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역사 속에 보내시고 하신 일들을 기록해 놓으셨을 놓으셨겠습니까 우리 인간도 마인드가 있는 존재입니다.
지성이 있고 감정이 있고 판단이 있는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경험과 벽돌과 이성이라는 시멘트로 집합되어 하나씩 하나씩 통합되어 온 것입니다.
예수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2천년 전 유대 땅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현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글을 읽을 때 시뮬레이션을 하씩 하나씩 하나씩 벽돌을 장만하자는 뜻입니다.
값없이 벽돌을 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 스스로 판단하라는 겁니다.
예수 그는 누구인지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 예수는 도대체 누구였는지
지금까지 예수 뒤를 따라온 이 시점에서 그를 누구라고 해야 할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주자 장자를 아십니까 오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나와 있는데 대충 생각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이 정도 발언을 하는 예수 그는 도대체 누구인지 가봅시다 네 감사합니다.
우리
한 페이지 넘겨서 84쪽 감남상 강론 마태복음 24장을 한번 여러분 펼쳐놓으시고요 성경을
24장과 25장이 이제 갑난산 각론에 해당되어지는 본문이죠.
지금 예수님께서 성전이 무너질 때가 언제 오는지 또 주에 임하실 때 어떤 징조가 나타나게 되는지 그리고 세상 끝날 때 어떤 징조가 일어나게 되는지 이러한 질문들이 강남산 강론에 다 담겨 있습니다.
왜 감남산 강론이라 이렇게 부르냐면 예수께서 올라가셨던 그 산이 이제 감남산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남산 강론 강남산 가르침 이렇게 부르곤 하죠.
오늘 이 4장과 25장을 우리가 강남상 강론이라고 이제 부르는데 이걸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구약에 있는 유다가 멸망할 때쯤의 장면과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한 시간은 그 두 장면이 오버랩 되어서 생각되면 이게 훨씬 더 잘 이해가 되어집니다.
구약 시대를 우리가 한번 봅시다 우리 작년에 우리가 구약 성경 읽어진에 했던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눈물의 선지자가 누구였죠.
예르미아였죠. 에레미아가 활동할 때는 난방 유다가 망할 때쯤이었습니다.
에르미아는 유다가 망하는 그 상황에 하나님께서 심판의 메시지를 계속적으로 이렇게 에르미아를 통해서 하게 하시잖아요.
난방 유다가 이제 망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제 나라를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만들어 오셨는데 백성들이 이방신을 자꾸 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그 나라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다라고 선포하시는데 그 죄목을 낱낱이 밝혀주시면서 이제 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심판의 메시지를 선지자를 통해서 이제 선포해 주십니다.
결국 바벨론리에서 나 다 멸망이죠.
그래서 이러한 처참한 처절한 광경을 에르미아가 목 놓아 울면서 그가 통곡을 하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눈물의 선지자 에르미아라고 말하는 거죠.
그런데 예레미야가 조금 달랐던 것은 뭐냐면 예루살렘 성전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는 것만 보는 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것까지도 예레미아는 보았어요.
그래서 신명기에서 모세가 애언을 하게 되어지는데 너희가 순종하면 축복이요 너희가 불순종하면 조조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에언이 자기 시대에 임한 것을 에레니아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보면서 그는 울었던 거죠.
왜냐하면 지금 예레미아는 이렇게 나라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뭐예요.
조주
뭐예요. 불순종하면 조주가 임하는 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을 정확히 알았기 때문에 그렇죠 아 그래서 당시 우리가 두 개 무대 a와 무대 b로 나누어졌다고 그랬죠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제 예루살렘 그쪽에 남아 있었고요 바벨론 땅에는 다니엘과 에스겔이 끌려갔었죠.
그래서 무대 두 개가 이렇게 운영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다니엘과 에슬겔은 끌려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곳에서 대원하고 에레미아는 남아 있는 남방 유다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전하고 그곳에서 거기를 단도리를 한다라고 이야기를 했었어요.
다니엘과 에스겔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곳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말에 가서는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을 심판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너희에게 올 거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눈에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그 자체가 이제 멸망이고 심판이라고 여길 거라고 생각하지만 엘레미아는 그 이후에 회복의 것들을 보았고 또 다니엘 에스겔은 이제 심판 구원 그 메시지가 분명히 너희 가운데 앞으로 도래할 것을 이미 구약에 선포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벨론 아사 헬라 로마
이 제국의 역사가 계속적으로 이어지지만 결국에는 뜨인돌 뜨인돌에 의해서 신상이 무너지고 그 돌 모덕에만 영원할 것임을 이제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주시죠 그래서 종말론적인 심판의 구원의 메시지가 선포되어지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뭐냐면 구약의 심판의 사건 그리고 구약의 심판의 사건은
다가올 신약 이후에 심판의 사건으로 다시 애언되어졌다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 아시고요 에스겔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성전이 다시 무너지지만 제공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권이 다시금 회복되어지고 또 다시 통치할 날들이 올 것이다라고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은 계속적으로 애언을 했었던 거죠.
그러면 이걸 기반으로 예수님께서 지금
강남산에서 이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우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지금 에리세아가 멸망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면서 울었던 곳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남산 위에 올라가셔서 ad 70년에 성전이 완전히 회파될 것을 예수님도 아셨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보고서 우는 장면이 오버되어서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
와 있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걸 보면서 지금 우시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마태복 24장 25장에는 종말에 어떤 심판이 이어질지 종말에 어떤 구원이 있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 장면이에요.
그러니까 24장 25장을 보면 난방 유다 그렇죠 그 구약에 있었던 그 마지막 장면과 오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그 날들이 겹쳐져서 이 감남산 예수님의 강론을 우리가 좀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예루살렘의 성전이 무너지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고 어떤 징조가 있을 것 이것은 미래의 이야기예요.
아직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이 오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이야기들은 그리고 여러 가지 많은 징조들은
미래에 있을 사건들에 대한 징조예요.
그래서 이 마태봉 24장을 보면 굉장히 많은 신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왜냐하면 근자에 있을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그리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 하실 때 나타나는 어떠한 징조들과의 구분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굉장히 24장 25장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어요.
아니 24장을 놓고 의견이 많이 분분했다.
이걸 좀 아시고 이걸 좀 봤으면 좋겠습니다.
24장을 펼쳐놓으시고 한번 읽어볼게요 마태복음 24장 한번 펼쳐놓으시고 한번 봅시다 5절 한번 읽어볼게요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로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욕합니다.
6절
난리와 난 난리 교문을 했었겠으나 너희가 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이 아닙니다.
쭉쭉 한번 읽어보십시오 16절에 있는 말씀 볼게요 그때의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이러한 진조가 보일 것이다라고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재림할 때 이런 징조가 또 나타날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어떤 징조와 예수님의 재림할 때 징조를 구별하지 않고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거기까지만 알면 좋겠어요. 23절 마태복음 24장 23절 그때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절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난 그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7절 말씀 볼게요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9절
그날 환란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절 그때의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의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의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절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가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여러분 보세요.
어디까지가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의 징조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세상 끝날까지의 징조인지를 구별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신학자들 사이에서 굉장히 의견이 분분하다라는 사실을 여러분 좀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32절 말씀 봅시다
32절 무아가 나무의 비유를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34절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이 세대를 어떤 세대라고 우리가 규정할지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예루살렘 성전의
징조인지 아니면 이제 다시 오실 어떤 재림의 징조인지 이건 정확히 우리가 애매하다라고 말하는 거죠.
그래서 요한계시록 단위엘 계시록 이 세 곳은 이 세 말씀은 이제 묵신데요.
이 묵시라는 게 뭐냐면 아포 칼립시스라고 이야기하면 돼 이게 뭐냐면 보자기로 덮어서 쌓아놓은 것을 열어 제쳤다.
그래서 뭘 보여주기 위해서 프로 해쳤다라는 표현인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뭘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시냐면 하나님의 종말에 대한 구원 계획을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 무너진 현상과 앞으로 미래에 예수님의 재림할 그 상황 종말에 있을 그 상황을 지금 함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라고 여러분 좀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래서 우리는 두 개의 렌즈가 있습니다.
바로 앞에 일어날 일을 보여주는 레인지 하나하고 저 종말에 일어날 일을 보여주는 레인지 하나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 두 개를 지금 딱 겹쳐놓고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냐면 남방 유다가 멸망할 때 이 다니엘 에스겔 이런 묵시 예언이 많이 나오게 되는데도 여러분 예레미야가 말한 대로 다시 70년 만에 다시 돌아오리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때도 뭐냐면 앞에 이를 보여주는 렌지가 있었어요.
엘레미아가 70년 만에 다시 돌아오리라 조금 있으면 이 일이 일어나리라라고 이야기했고 또 종말에 있어서 인자가 오실 때 너희가 이러한 날이 오리라라고 하는 ng를 또 두셨다라는 그러니까 예수님 이 남방 유다 구약에도 두 개의 렌즈로 이 관점을 봤다라는 것을 여러분 좀 이해하시면 되겠다라는 생각
좀 이해가 되시나요. 70년과 재림 여기는 또 70년 만에 너희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하는 렌즈 미래 예수님의 제 이름의 렌즈 여기는 에이디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한 렌즈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최후의 재림할 렌즈 이 두 가지로 보고 있다.
라고 여러분 이해하시면 돼요 그래서 24장 이 말씀은 이러한 두 개의 렌즈를 항상 머리에 염두에 두고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36절 보십시오 36절에다가 볼펜으로 슬러시라는 딱기 긁어놓으세요.
36절부터는 뭐라고 적어놓으시냐면
종말론 예언 이렇게 적어놓으세요. 36절에는 정말론
종말론 예언 마태복음 24장 36절 36절부터는 신학자들도 정확히 결론을 내렸습니다.
ad 70년에 일어날 성전의 멸망의 이야기를 한 게 아니라
종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재림하실 때 일어날 종말의 이야기를 이 36절부터는 하고 있다.
라고 여러분 이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여러분 끝날이 언제일지는 모르는 거예요.
그렇죠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지는 아무도 몰라요 아마 여러분도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이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계시록에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그날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나 중요한 건 뭐냐면 종말이 반드시 오는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게 헷갈리기 때문에 우왕좌왕하기도 하고 그리고 호기심을 가지고 계시록을 보기도 하고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기에
답을 얻기 위해서 그 답을 주는 사람의 말을 따라 현혹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지금 이 본문상에는 예수님이 지금 조금 있으면 돌아가실 거예요.
그죠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뭘까요.
호기심을 가지고 안절부절하면서 이때인가 저 때인가 불안할 게 아니라 너희가 지금 집중할 것은 다가올 저 미래가 아니라
종말을 너희가 종말이 너희에게 올 것을 너희가 알고 지금 이 현재에 너희의 삶에 너희의 삶의 현장에 집중하라 이게 바로 24장 25장의 말씀의 핵심이에요.
구약 선지자 예언의 포인트는 뭐예요.
이러한 일이 일어날 거야 그러면 지금 너희가 순결하게 살아야 해 너희가 지금
언젠가는 너희에게 종말이 와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너희가 어떻게 사명을 감당할지를 너희는 고민해야 돼 이게 바로 진주를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우리가 미래 지림 어떤 징조 이거 가지고 이리 일비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그래서 제가 굉장히 많이 이제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게 어떤
종말의 징조에 이리일비 해서 이리저리 막 뛰는 그런 모습들을 저는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베리칩이라든지 또 요즘 굉장히 많은 음모론도 많잖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거기에다가 관심 쓸 필요가 없다라는 거예요.
이런 종말론을 아는 사람은 종말의 어떤 징조에 마음을 두지 않아요.
왜냐하면 징조를 안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을 더 받는 게 아니라는 거죠.
징조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오늘 내게 허락된 이 장소에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우리가 최선을 다해 감당하라고 주시는 말씀이 이 예언의 말씀 그리고 이 징조의 말씀이 되어지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37절 노아의 때가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이러하리라 38절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까지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하게 깨닫지 못할 여명이 있으니 인자 이 마음도 이와 같으니 그렇죠 지금 홍수 노아 홍수에 빗대어서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4장
24절에 42절에 뭐라고 그래요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깨어 있으라 깨어 있어라 그렇죠 여러분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43절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싹 4절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 자가
우리라 그러니까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않을 때 주님이 오신 거예요.
그런데 언제 오실지 그때를 우리가 너무 궁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게 허락된 날 최선을 다하면 돼요 45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 그렇죠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은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곧 있으려다 47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절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오리라 하여 49절 동료들을 때리면 술 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절 생각하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절 어미 때리고 외식한 자가 겪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일을 하리라 이렇게 나오죠 36절부터 그날 그때는 아무도 몰라요 그러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25절 25장에는 뭐가 나오냐면 열 처녀 비유가 등장을 합니다.
25장 1절 보십시오 그때에 이 그때는 뭘까요.
24장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25장 그때는 뭘 의미할까요.
그때는 무슨 때
24장 36절부터 종말의 때라고 그랬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종말의 때죠 그죠 계속 이어져 가고 있죠 종말의 때예요.
재림의 때예요. 그래서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가 내 조망했다.
하리니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운 자라
밀어난 자는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쓸기 있는 자는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
근데 5절에 보니까 신랑이 더디 와요 그러면 다 졸며 잘세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건 뭐냐면 신랑이 더디어 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미련한 여인 슬기로운 여인 둘 다 두 부류가 다 잤어요.
그죠
근데 두 보류가 다 잤어요. 근데 밤중에 소리가 났어요.
신랑이 왔다. 맞으러 나와라라는 소리가 들리니까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해서 나간 거죠.
근데 슬기로운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슬기로운 처녀들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준비한 것은
너희가 쓰기에는 다 부족하니 차라리 지금 나가서 하는 자들에게 가서 니가 쓸 것을 사 가져오는 게 더 빠르겠다.
그런데 나가서 사러 온 사이에 신랑이 와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혼인 잔치가 멀어지게 되고 문은 닫혀버리게 된 거죠.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그때
말하죠.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느라 그런지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이지만 이게 지금 예수님께서 밤남산 각론에서 하셨던 말씀임을 잘 몰라요 아 지금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면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구나라고 여러분이 이해하셔야 됩니다.
더불어 조금 설명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혼인 잔치 팔레스타인의 혼인 잔치는 주로 밤에 이루어집니다.
이건 잘 아시는 내용이죠. 낮에 너무 덥기 때문에 밤에 주로 합니다.
여기서 신랑은 누구일까요. 메시아이죠.
결혼식은 뭘까요. 종말의 혼인 잔치 있죠 두 종류의 운명이 갈리게 되어지는데
여기서 준비한 자와 준비되지 못한 자 저는 여기서 준비된 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현장에서 허락해 주신 그곳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자를 우리는 등불 기름 준비한 자라고 적용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름을 준비를 해야 될 것 같아요.
깨어서 기름을 준비합시다 아
25장 14절 너무나 유명한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또라고 나오죠 14절 또 이 또는 뭘까요.
종말에 관한 비유의 말씀이 이어지는 또 다른 비유라고 이야기하면 되겠죠.
이건 내가 다 설명하지 않을게요 전에도 설교 말씀했고요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에요. 엄청 큰 액수죠 개인이 거래할 수 있는 단위를 넘어서 한 나라와 한 나라가 거래할 수 있는 굉장히 큰 단위를 지금 주인이 종에게 맡겼어요.
평생 만져볼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자 다섯 달러 더 받은 총
노달한테 받은 종은 장사를 했죠.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 막대한 돈을 잘못 했을 경우에 어떻게 잘했을 경우에는 이익을 얻었지만 잘못했을 경우에는 손해를 볼 수가 있잖아요.
위험 부담이 따르는 거 그래서 여러분 한 달한테 받은 자는 위험
요소가 있는 거를 알고 그냥 땅에 묻어 놓아버린 거죠.
그런데 주인이 와서 뭐라 합니까 차라리 이것을 우리 대금 업자에다가 주었더라면 그냥 이자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 아니냐라고 이야기하죠.
근데 이때 한 달 한테 받은 종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며 당신은 묻은 사람이라 이 말의 뜻은 당신은 아주 냉정하고 가혹한 사람이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다라는 그런 뜻이에요.
신지 않는 대로 거두려 하고 부리지 않는 곳에 모으로 주로 알았기에 두려워하여 땅에 감추었나이다.
당신의 것을 가지소서 이건 뭐냐면 1 포인트가 이건 것 같아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이걸 투자해서 혹시나 내가 손해를 봐도 주인은 나를 이해해 주실 거야라는 그런 주인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에 대한 인식이 달랐어요.
그 사람은 냉정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손해를 입히게 되면 반드시 벌하실 주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다는 거예요.
너희가 혹시나 나를 신뢰하여 너희에게 맡겨준 것을 과감하게 한다면 혹시 너희가 잘하면 은혜고 혹시 손해를 보더라도 그것도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했기에
그까지도 내가 다 수용하리라 이게 이 달란트 비유의 핵심입 주님의 마음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주님의 의도를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위험 부담이 있지만 그걸 감수하더라도 할 수 있는 주님을 신뢰하는 말 그래서 주님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 떠는 종을 악하고 배우는 종이다라고 이야기하죠.
그래서 네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기의 것을 다 빼앗아 그것을 한 달란트의 것을 빼앗아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준다라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33절의 말씀 보십시오
25장 31절 인 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오른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24절 34절 그때의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은 자들이여 나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지금 마지막 재림의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너희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라 그리고 너희에게 맡겨진 일을 너희가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를 지금 말씀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갈리는 때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갈릴린 때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중간 지대가 없다라는 거예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부름을 받은 부류가 있을 것이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울음을 받을 종들이 있다. 그런데 중간 자리는 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 오른편에 어때요 양 왼편에 염소 이거를 딱 선정해 놓으신 거예요.
그러면 왜 양이 오른쪽일까 이들을 위한 나라가 언제부터 예비되었는가 뭐냐 하면 창세 전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어요.
그 이걸 여러분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오른편에 있는 양 왼편에 있는 염소 그런데 언제부터 열이 되었어요.
창세 전부다 예배소서 1장의 말씀 한번 찾아볼게요 예배소서 1장
4절 보십시오 곧 창세 전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의미 없게 하시려고 언제 택하셨다.
그랬어요. 창세 전에 창세 전에 하셨어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건 뭐냐면 착한 일을 한 거예요.
착한 일을 안 한 거예요.
착한 일을 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을 좀 잘 기억하십시오 로마서 9장에 있는 말씀으로 한번 넘어가 봅시다 로마서 9장 로마서 9장 10절 로마서 9장 10절
우리 김성훈 집사님 한번 읽어주시겠습니까 저 지금 찾고 있습니다.
예 로마서 9장 10절입니다.
로마서 9장 10절 제가 읽어드릴게요 그뿐만 아니라 또한 리보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낳지도 아니하고 무슨 손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하려 하사 여러분 다시 한번 읽어드릴게요 11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절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절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오 하나님께 부리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절 모세게 이르시되 내가 극률이 여길 자를 극렬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 줄 원하는 자로 말미암면도 아니오 다른 박질 하는 자도
자로 말미암도 아니요. 오직 극률이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해가 되시죠 마태복음 25장 다시 내려갑니다.
이 말씀의 뜻을 여러분 잘 이해하실 수 있죠 그렇죠 인간의 어떤 선함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창세전에 예비되었다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양을 오른편에 두는 이유는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오른편에 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누가 택하셨다라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이 택하신 거예요.
언제 창세 전에 택하셨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양의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배해 주신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니가 줄일 때 목 마를 때 병이 들었을 때 너희가 오른쪽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인들이 언제 우리가 도대체 이런 일을 했습니까라고 묻자 35절 35절 15절 마테 공 15절 내가 줄일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여
넓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줄이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며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의 나그네 드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얼 벗으신 것을 보고 온 입혔나이까 39절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내가 가서 베었나이까 하리니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절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우리의
들어가라 44절로 넘어갈게요 너희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줄이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은에 드신 것이나을 벗으신 것이나 병 드신 것이나 옥에 갇힌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는 어때요
예수 앞에 우리가 섰다면 아마도 나는 이보다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나는 이러한 의로운 행동을 했고 나는 이러한 사역도 했고 나는 이러한 사람도 전도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도 남을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45절 보십시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 지극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되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니라 여기다 한번 밑줄을 한번 쫙 물어보세요.
이 교리는 뭐냐면 아주 중요한 무언론에 관한 교리인데요.
지금 양과 염소의 자리가 갈린 것은 이미 창세기에 애정되고 택하셨어요.
너희가 이렇고 이렇게 했기 때문에 오른편에 섰고 너희가 이렇게 이렇게 했기 때문에 왼편에 섰다라는 게 결코 아니라는 거예요.
종말의 심판의 날에는 미가 양의 자리에 있든지 염소의 자리에 있든지 물 중에 하나는 반드시 서게 될 텐데 반드시 갈리는 날이 오게 될 것인데 이것을 쐐기를 박듯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해 놓으신 거예요.
그런데 양의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이 하나가 있다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신
자들이라는 게 나의 어떤 공로나 나의 일함으로 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100% 은혜로 택한 자들이다.
극률로 택한 자들이다. 창세전부터 택하셨다.
그러면 우리가 좀 이해가 안 되잖아요.
아니 누구는 택하고 양의 자리에 두신다고 하며 누구는 택하지 않고 염소의 자리에 두게 한다
정말 양의 자리에 있는 게 내가 맞다면 정말 학부의 심판의 자리에 반드시 그 자리에서 피할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은 과연 뭘까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좀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고 내가 믿는다면 그래서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금률하심으로 내가 은혜를 받았다라고 1차적으로 여러분은 이해하셔야 돼요 이게 바로 우리 삶에
본질적으로 나타나야 되는 가장 중요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또 설명을 할게요 2번 한번 넘어가 볼게요 85쪽입니다.
85쪽 아라관 강론입니다. 중요한 내용들이 계속 나와요
지금 제가 감나사 내용의 것을 다 이야기했어요.
여러분 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라판 각론 유월절 네 번째 식사에 이어지는 각론 성경에는 수요일의 기록은 없어요.
목요일날 가락방에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는 내용만 나옵니다.
누가복음 22장
누가복음 22장입니다.
14절
때가 이름에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때가 이런 줄을 아셨어요.
이 때라고 하는 것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 때를 말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때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그때를 말하면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만약에 내가 죽는
죽음의 시간 건 이건 넘어갑시다 우리 넘어갑시다 1장 요한복음의 내용의 1장 요한복음의 내용을 한번 가볼게요 넘어 요한복음 1장 1장은 소론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의 1장은 소론 것 같고 2장부터 12장까지가 표적의 책이다라고 불러요 지난번에 제가 금요 천하회 때
이 본문을 제가 설교를 했어요. 첫 번째는 가나 혼인 잔치 두 번째는 신의 아들을 원격 치료로 놓쳤던 사건 세 번째 베데스다 음모 38년대 병자 고치셨던 사건 네 번째 오병희의 다섯 번째 물리를 걸으셨던 거 6번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고치셨던 거 일곱 번째는 가사로 죽음의 표적
여러분 이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인인데요.
이 사인은 손가락으로 딱 가리켜서 어디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곧 표적입니다.
빛이신 예수께서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그 예수께서 손가락으로 가르쳐주시는 그것이 바로 표적의 표적이다라는 의미가 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3장
부터 20장을 뭐라고 부르냐 영광의 책이다라고 불러요 영광의 책이다라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니 요한복음은 단순한 순환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요한이 생각하는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이 환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의 영광이 개시되는 그 사건을 해서 영광의 책이다라고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뭐예요.
표적의 책
그리고 나서 영광의 책 이 두 가지가 퍼러스가 된 거죠.
표적은 뭐예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 영광의 체계로는 예수님이 다시 영광의 자리로 가실 것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다시 영광의 자리로 올라가실 것을 보여주는 책이 영광의 책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부록이 21장인데
실패한 베드로에게 가서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라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그 사건이 나오게 되죠.
그래서 요한이 실패했을 때에 보여주는 예수님의 사랑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 책이 바로 요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13장 2절 볼게요 요한복음 13장 2절 이건 지난번에도 제가 한번 설교했던 거예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는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저녁 먹는 중에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고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신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바르려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의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시고 씻기시기를 시작했다.
장면이 나오죠 조금 더 빨리 찾아볼게요 누가 복음 22장입니다.
누가복음 22장 마태 마가 누가
누가복음 22장 7절 보십시오 오늘 좀 말 좀 찾을게요
7절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 날이 이른지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심에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6월절을 준비해야 하며 우리로 먹게 하라 여자 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냐니까 이러시더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 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내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게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그들이 나아가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나 6월절을 준비하니라 14절 보세요.
때가 이르되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때 떡을 떼며 예수님께서 잔을 나누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19절 말씀 보십시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에게 주는 이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자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1절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4절 24절
베드로가 부활 또 이르되 그들 중에 잠깐 그들 중에서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안지 예수님께서 6월절 만찬에 이제 밤에 지금 이것을 나누시고 바로 잡히시는 그런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요한복음 13장 다시 아까로 넘어올게요
왜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계속하시냐면 6절의 말씀 보십시오 심은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가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 대답하기 바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니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아니라 여기 한번 밑줄 한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되 나의 하는 것을 니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아니라 여러분 이 말씀은 뭘까요.
사실 남의 발을 닦아주는 것은 유대인들끼리도 서로가 서로에게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이렇게 터부시되었던 그런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라고 우리가 쫓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의 발을 닦는 것은 유대인으로서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는 모습이에요.
근데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거죠.
그러니까 그들의 면회는 굉장히 이례적인 행동을 예수님이 하고 계셔야 8절 우리는 당연히 베드로가 뭐라고 말할까요.
베드로가 가로대에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상관이
이때 베드로가 말하죠.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시옵소서 10절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14절 내가 주의 주와 또는 선생이 되여 너희의 말을 시켰으니 뭐예요.
너희도 서로 시키는 것이 옳으니라 15절 15절 15절 밑줄 한번 딱 한번 불어보세요.
현관으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오늘
지금 예수님께서 세족식을 하시는 이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습은 섬김의 모습 맞아요.
그런데 마치 예수님께서 뭔가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그러한 어떤 동기를 가지시고 연극하시는 것처럼 이것을 행하셨습니다.
성만 차도 마찬가지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이 마치
연극의 어떤 성극의 한 장면처럼 보여주고 있는 그런 장면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의 이 섬김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가 윤리적이나 어떤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선계만을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 보통 이제 기도원 가면 목사님이 허리에 수분을 누르시고 우리 교회 집사님들이 발을 내미세요.
닦아주는 그런 섬김의
모습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모습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게 뭐냐면 원론적 섬김의 원론적 섬김 원론적 섬김 예수님께서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시는데 예수님이 어디까지 백성들을 섬기셨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섬기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섬기심은 아주 극단적인 섬깁니다.
예수님은 한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섬김 목숨을 내어주는 그런 섬김 인 거예요.
그런데 단순히 목숨만을 드리는 게 아니라 죄자들이 죄를 씻어주기 위한 원론적인 섬김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너의 죄가 씻겨져야
나와 다른 관계가 될 수 있기에 나는 새 언약 어린 양의 피가 되어서 너희의 죄를 말끔히 사에 줄 수밖에 없고 그래야 너와 나는 법인 관계가 유지될 수가 있기 때문에 원론적인 예수님의 섬김의 모습을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읽어내야 됩니다.
두 번째 윤리적인 섬김의 모습은 사실 우리가 어느 자리까지 낮아지는가
사실 종의 자리까지 낮아져 섬기라라고 하는 말씀을 많이 하지만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러분 이 모습은 종의 모습으로 섬기라는 거예요.
그러니 완전히 낮아져서 종의 모습으로 섬기라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섬긴 이 두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 5절
빨리 한번 찾아볼까요. 빌리보서 2장 5절 빌리보서 2장 5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들은 근본 하나님의 본 짓이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셨어요.
그런 분이 유대인 여러분 종들도 하지 않는 을 신는 모습을 통해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종의 모습으로 섬기라 하지만 거의 모든 일을 할 때 우리도 사실 섬긴다라는 말은 말이에요.
식당으로 섬긴다 예배로 섬긴다 봉사하는으로 섬긴다 그런데 우리가 섬긴다고 할 때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는 뭐냐면 내가 칭찬받을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섬기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다르다는 것 내가 좋아하고 있는 것 내 시간 내 노력 내 수고를 들여 내 물질까지 헌신하면서 수고하고
내가 열심히 뭔가를 하지만 이건 분명 인정받고 칭찬받고 타인에게 참 잘한다 라고 하는 그런 격려의 말을 받아야 된다라고 우리는 기본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뭐냐하면 아니야 종의 모습은 어떤 경계나
어떤 격려나 어떠한 잘한다라고 하는 칭찬을 이 위에 섬김의 모습이 아니라 너의 자존심이 우겨지더라고 우리가 때로는 수치를 당하더라도 니가 지금 그 섬김을 하며 욕을 먹고 마치 타인의 나를 종 다루듯이 이렇게 하고 나를 격멸하게 종처럼 대우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일을 할 수가 있어야 한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느냐라는
요청이라고 우리는 받아들여요 여러분 우리는 섬긴다고 하지만 우리의 섬김은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게 아니에요.
하나를 섬기면 하나는 섬김을 받고 싶어 하는 모습이 우리 안에 있어요.
그래서 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을 우리는 섬기지만 그 사람들이 동일하게 나를 섬겨주기를 바래요 내가 섬기지만 그 섬김이 제대로 오지 않으면 화가 나요.
그리고 인정받지 못함에
욕구로 인해서 많이 서운하기도 하고요 요한복음 13장 16절 니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는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라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주님보다 크지 않아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7절
18절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아니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절 쭉쭉 넘어가고 22절 제자들이 서로 보며 육에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절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신 자가 사도 요한이죠.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절 심은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데 25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들을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 오니까 2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대답하시되
그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셨다가 바로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절 28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아는 자 중에 아는 이가 없었다.
제가 지난주에 여러분에게 보내주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성만찬 그 모습 여러분
한번 보셨죠. 카톡에 다 있을 거예요.
한번 봐보십시오 2 18절의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었다.
그 당시에 유대인의 습관을 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제가 말씀했던 것처럼 레오단도 다비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렸던 것은
유대인의 문화 풍습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식탁에다가 배석한 게 아니라 그들은 서양인의 방식으로 이 그림을 그린 거예요.
제가 보내드렸던 그 그림은 유대인들이 어떤 방에서 서로 만찬을 즐길 때 그렇게 앉아서 최후의 만찬을 하셨을 것이다라고 유추해서 올려놓은 그런 그림입니다.
말 바 형태의
테이블에다가 식사를 하는 거죠. 방석이 쭉 앉아 있어요.
예수님은 어디에 있냐면 지금 가장 왼쪽 요한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다빈치가 그렸던 최형만 찬 예수님이 중앙에 앉아 있는 모습들 그려지죠
이때는 어서 먹거나 의자에 앉아서 먹거나 이런 건 없었어요.
그냥 테이블에다가 팔꿈치를 딱 대고 이렇게 비스미를 뒤로 하고 머리를 테이블 앞쪽으로 이렇게 대고 이렇게 음식을 떼다가 이렇게 주는 거죠.
그러니 보십시오 예수님이 앞쪽으로 하고 발을 뒤쪽으로 뺐어요.
그러면 요한은 예수님이 뒤에 가 있고
다른 여자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 바로 앞 그죠 기 약간 기어서 이렇게 약간 비스듬이 누워 있다고 한다면 바로 예수님 바로 옆 옆에가 가롯 유다가 돼 있던 거죠.
예수님께서 이 가롯 유다에게 찍어서 그에게 줬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가롯 유다가 자신을 팔 자인 것을 이미 알았습니다.
그죠
지금 예수님께서 떡을 찍어서 누구에게 줄 수밖에 없는 게 뭐냐 하면 다른 유다밖에 없어요.
저 베드로는 앞에 있기 때문에 베드로를 갖다 줄 수도 없고 바로 옆에다가 있는 가문들에게 줬던 거죠.
예수님이 그 모든 것을 다 아실 거죠.
왜냐하면 유다가 예수님을 개발할 자인 것을 아셨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유다의 머리가 예수님의 그 품 가까이 딱
아주 친근하게 가까이 앉는 그런 속에서 자신의 칼 자인 줄 알았지만 우리를 옆에서 두고 말씀해 주시는 그런 모습이죠.
그런데 지금 이 최후의 만찬을 했던 그 6월절의 도성의 분위기는 어땠을까요.
굉장히 무서운 살기가 뛰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주 무거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너희 중에 나를 팔 자도 있다. 분위기가 굉장히 무겁죠
그 중에서 지금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9절 31절 봅시다 31절 13장 31절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 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이 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죠 반드시 피론적으로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죠 33절 33절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너희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아예 가는 곳을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이 말씀은 뭘까요.
33절 내가 떠날 거야
근데 너희는 올 수가 없어 너희는 나를 찾을 수 없어 이 말씀은 지난주에 우리가 보았던 지진학길에 보았던 예수님의 초망치 설교했 때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님은 앞으로 또 떠난다는 말씀을 매번 자주 하십니다.
31절부터는 본격적인 고율 설교를 지금 하셨다라고 여러분 이해하시면 돼요 31절부터는 예수님의 완전한 고별 설교의 마지막 부분이에요.
근데 오늘 본문에 이제 핵심이에요. 34절입니다.
34절 지금까지 했던 이 모든 것의 가장 핵심 34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34절 시작 새 계획을 너희에게 주노니 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가 서로 사는 이루어서 모든 사람이니 너희가 내 제자라 알리 아 아 구약에서의 옛 개명은 신약산에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허락하십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애굽의 노예 있었던 그들을 출애굽시키죠 구원해 내셨죠.
신의 산에 데리고 와서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은
단체로 언약을 맺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내 말을 잘 들으면 거룩한 백성이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소외된 백성이 될 것이다 라고 주셨던 게 바로 십계명과 율법이었어요.
이걸 우리가 뭐라고 그러냐면 옛 개명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개명은 신약의 예표로 보여준 거예요.
신약에서는 구약의 모형이 마치 희미하게 보여졌던 것이 이제 선명하게 보여지는 것이 신약에 나타나는 건데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데 예수님께서 누구를 계속 죄물로 바쳐 구원을 이루셨습니까 자신을 배석 제물로 바쳐 이렇게 주셨어요.
언약을 맺게 하는 제사의 제물이 예수님 스스로가 된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언약을 자신의 희생을 통해 죽으심으로 통해 다시 맺으셨어요.
그래서 예레미아 31장에 보면 새로운 언약을 먹이신 사람에게는 새 개명이 주신다는 말씀 새로운 언약을 맺는 사람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라고 이야기하는 그런데 새 계명은
구약의 돌판을 써서 주신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서 주셨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은 없어졌잖아요.
그죠 그 돌파는 어떻게 우리가 볼 수가 없어요.
무전되어 오는 것뿐이죠. 그러나 우리 마음에 새겨주신 주님의 새로운 개명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영원한 거예요.
근데 그게 뭐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의 사랑은 뭐예요. 목숨까지 내어주신 사랑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우리는 할 수가 없어요.
이건 바로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게 뭐냐면 바로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의 원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16절
심은 베드로가 이르되 그러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 예수께서 대답하되 내가 가는 곳이되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1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지금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헌신하죠. 저는 베드로가 이 말을 했던 것은 그냥 헛된 말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
혁명 정부를 꿈꿨던 사람이에요. 근데 뭔지는 몰라요 아주 긴박한 순간이 다가올 것을 비관해요.
예수님은 이런 상황 속에서 뭔지는 잘 모르겠어 베드로가 생각할 때는 근데 예수님이 목숨까지 버리겠다라고 말씀을 하세요.
38절 예수께서 대답하되 대답하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루네 다 울기 전에
니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여러분 이 예수님의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가 굉장히 놀랐을 거예요.
왜냐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지금까지 다 말하는 뉘앙스를 보게 되면 누가 나를 팔 것이다.
누누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 아주 분위기가 너무 무겁고 너무 가라앉아 있는 거 근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위로 위로를 주시고 격려를 주시는 그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을 믿으니 곧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배하려고 하느니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위하여 영접하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 왜 이러한 뉘앙스의 말을 하는지는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다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들었으면 어느 정도는 알았을 거예요.
우리 같으면 몰랐을 거예요. 그러니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는 알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이 예수님의 당시 유대인들의 문화를 우리가 좀 잘 알 수가 있는 건데 예수님께서 봉생의 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 가난한 혼인 잔치 표적으로 시작해서 공생의 사역 기간 동안 계속 썼던 모티브가 뭐냐면 포도주 내 자를 마시라 마지막에 가서 요한계시록의 혼인 잔치가 완성되어지는 장면도 보여주시는데요.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는 게 뭐냐면
잔치를 베풀고 포도주와 떡을 깬다. 이런 말씀을 하시고 또 코민 잔치 비유를 하시고 나서 아무튼 막 여러 가지 막 이야기를 계속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1년 정도 야 혼인 잔치할 때 1년 정도 가서 혼인 잔치 신부가 여름 이거 알죠.
유대인들은 결혼을 하게 되면 먼저 조문을 하고 다시 고향집에 가서 1년 동안 그 신부와 같이 살 집을 마련해 놓고 다시 와서 결혼식을 한다라는 거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그들의 문화를 어느 정도는 알아요.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는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거처를 마련하시고 어디를 가신다라고 하는 말씀이구나라고까지는 어느 정도는 알았을 것 같아요.
그죠
당시 신약의 마지막 마지막에 혼 자치가 완성되어지는 그런 부분들을 그들은 어느 정도는 이해를 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도마가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근데 예수님께서 뭐라 그래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의 길을 앞으로
닦아 놓으리라 너의 길을 예비하리라라는 말씀을 계속 일관적으로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제가 결론을 내릴게요 오늘 예수님의 그 여정을 다 보시면명 구약의 율법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한 신약의 가장 세 개 뭐예요.
서로 사랑하라라는 원칙을 말씀하세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어떠한 외적인 양은 뭐 잠깐만 우리의 어떤 의지나 어떤 선한 행동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새 개명 뭐예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그것을 지키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이 말의 뜻은 뭐냐면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뜻으로 될 수는 없고 창세전에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 되어지지만
구원받은 자에게서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지는 현상은 뭐냐면 서로 사랑이라는 원리가 보여진다라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서로 사랑이라고 하는 이 주님이 주신 대 교명을 우리의 삶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삶을 살 때 우리가 구원받았던 백성이 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라는 거예요.
이 말 뜻이 알겠죠.
우리가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게 아니에요.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다 정해 놓으셨어요.
그러나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 반드시 드러나는 것은 서로 사랑의 원리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서로 사랑의 원리가 여러분 삶 가운데서 계속해서 나타난다면 여러분의 구원은 확실하다라고
말할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내 크리스 커브리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조금 요약을 해볼게요 좀 긴 말씀이었지만 제가 영어를 왜 이렇게 길게 했냐면 마태복음 24장 25장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말씀을 잘 이해를 못하면
요한복음 13장 14장에 있는 내용도 잘 이해가 안 돼요 그래서 그 부분을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자세히 보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나머지 부분만 간단하게 하고 마치고 다음 주로 하도록 할게요 오늘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코로나도 있고 또 굉장히 힘든 상황인데도 이렇게 들어오셔서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