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4.07 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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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7 성경공부

아마 이것은 베드로의 기를 확 죽였던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다 함께 읽어봅시다 거기 보면 베드로의 귀가 확 죽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되어져서 끝맞추고 있죠 지난번에 한번 읽었던 기억이 나요.
네 번째는 도마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나오죠 도마도 마찬가지예요.
용기를 내어 웃습니다. 도마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용기가 있었던
제자였던 것 같아요. 어디든 어디로 가십니까 그 질문에 예수님이 이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어떤 세상의 좌표를 이제 도마는 묻고 있지만 예수님은 길이다.
진리다 생명이다. 영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어요.
그러면 도망가 다시 묻습니다.
떠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 질문의 의도는 예수 혁명을 일으키시는데 왜 이렇게 중요한 날에 떠난다는 말씀을 하십니까라는 거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예비하러 떠난다 아니 이곳에서 지금 이곳에서 뭔가 예수의 혁명에 큰 획을 그으셔야 되는데 왜 떠난다고 하실지 예수님은
너희를 내가 다시 예배하러 돌아오겠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의 말씀도 마찬가지고 지금 도마화도 떠난다라는 개념을 계속 말하고 계십니다.
근데 이런 개념을 예수님이 뜬금없이 꺼낸 건 아니었어요.
지금까지 사역을 하시면서 나는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대중에게도 또 제자들에게도 누차 말씀을 해 왔던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는 아직까지도 떠난다라고 하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를 못 했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서로 간의 질문이 동문 서답이에요.
질문의 의도가 몰이해에서 비롯된 질문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답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문서답하고
지금 서로 간에 뭔가 핀트가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우리가 그래요 보통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요 서로 살아왔던 환경과 배경이 달라요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경험했던 것도 다르고 우리의 과거 그 사람의 과거가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이해해서 말하지만 상대는 전혀 다른 의도를
이해하고 또 그렇게 말한다는 말이죠.
합의점이 맞춰지지 않는 거 이거죠. 이제 한 사람의 한 사람과 현재의 나가 만나죠 그러나 또 한 번은 그 사람의 과거와 나의 과거가 만나 우리는 대화를 하면 내 사람이 만나는 벽이 되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어느 한 편에서 그 사람이 형제와
과거를 통합해서 그 사람을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 한 사람이 그 통합된 그 사람을 이해해서 대화가 가능하겠지만 과거를 전혀 배제한 채 그냥 현재와 현재 어떤 그 말만 가지고 대화를 나눈다면 절대로 대화가 이어질 수가 없는 거예요.
가장 좋은 케이스는 이 사람도 과거를 이해하고 나도 현재와 과거를 다 이해하고 대화를 나누게 되면
대화가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제 이렇게 대화하는 방법 공감하는 방법 또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이제 통합한다라고 하는데 이렇게 통합하는 지식과 어떤 기술이 있다고 한다면 충분히 그 사람이 현재의 그 사람만
놓고 이해하는 게 아니라 두 상황을 다 이해하고 대화를 하겠죠.
지금 제자들과 지금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각도로 지금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라는 것 요한복음 15장 3절 15장 3절 임도수 원사님 우리 하나를 음속으로 해놓으셔야 돼요 두 개를 켜놓으셨죠.
네 왜냐하면 이야기하고 나서 이게 돌아와요 그러니까 메아리쳐 들립니다.
하나는 음속으로 해놓으면 음속으를 다 두 개 중에 하나가 음소거가 방금 제가 해서 그래요 제가 제가 제가 트여서 그래요 그 창은 형제가 좀 좀 해주세요.
이게 계속 메아리채 돌려오면 신경이 써 내 몫을가 이런가
내 목사가 이런가 이렇게 내가 헷갈려요.
그러니까 이게 좋아요. 그래요 좋습니다.
그래서 지금 요한복음 15장 3절에 보면 요한복음 15장 3절에 보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게 뭐야
이 본문이 아닌가 아무튼 넘어갑시다 지금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어떤 재림 떠난다 다시 내가 너희의 처소를 예비한다 이와 같은 개념을 말씀을 하지 않으셔요 그러니까 그냥 예비하러 간다라고만 말씀하고 재림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설명을 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레미라는 말을 떠올리지는 않아서 그들이 만약에 말을 한다 해도 잘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마 몰랐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현실에 지금 이슈는 지금 예수 혁명 정부의 자신이 아마 큰 역할을 감당할 것 그것밖에 생각을 안 했을 것 그러니까 도마는 끊임없이 묻는 게 도마가 의심이 많잖아요.
아마 호기심이 굉장히 많아요. 열두 제자가 있었지만 그중에 도마가
끊임없이 이렇게 질문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본인이 이해하는 데까지 질문을 계속했을 거예요.
본인 이해가 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그런 성품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끊임없이 나는 길이라 진리라 생명이다.
예수님은 현실의 길을 묻지만 도마는 현실의 길을 묻지만 예수님은 예수님이 가야 할 영적인 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7절의 말씀 보면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아버지와 나라는 개념을 해서 한 가지 힌트를 주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때를 이야기했고
떠난다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제자들은 이해를 못했어요.
그런데 한 가지 힌트는 아버지와 나는 동일하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열어주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영적인 논리를 계속해서 자극을 하는 겁니다.
a는 이렇습니다. a는 b입니다. a는 c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가 b가 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말은 어떠니라는 식으로 계속 계속 정보를 주고 있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복음서에 끈질기게 예수 그리도 누구인가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쫓았잖아요.
그래서 그런데도 사람들은 몰리에 잘 알지 못했어요.
이제 도마의 대화가 끝난 다음에 이제 빌립이 용기를 내서 다시 이야기를 합니다.
8절 보세요. 14장 8절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은 그나마 또 용기가 있었던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은 다 잠잠한데 도마에 바르네의 용기를 얻어서 빌립도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근데 뭐예요. 빌립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족하겠나이다.
여러분 어떠세요. a는 b다 아니가 a가 b가 되기 위해서는 a 다시 원을 너희가 알아야 한다 했더니 에이 다시 원이 뭡니까라는 식으로 또 질문을 계속하고 있죠 그래서 빌립은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빌립도 유대인으로 살면서 아마 또 하나님에 대한 존재가 궁금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빌립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알고 싶어 했고 또 그 존재를 이제 탐구하고자 했던 그런 거죠.
여러분 모든 인류가 그랬던 것 같아요.
철학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어떤 사회학자도 마찬가지고 과학자도 마찬가지고 신 하나님 이 존재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목욕 금요 우리 철학회 때 제가 신학을 계속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자기 자신을 계시해 줄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알 수가 있다라는 겁니다.
모든 존재는 신을 보고 싶어 해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그렇습니다. 빌리바 너와 내가 함께한 지가 3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왜 내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그거죠.
내가 아버지고 아버지가 나인데 나를 보고 있으면서도 왜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그게 주님의 답이었어요.
근데도 그들은 예수님이 아버지가 되심을 이해를 못했던 거죠.
아마도 그랬던 것 같아요. 제자들에게도 군중들에게도 아무리 함께 예수님과 살았어도 또 그의 이적을 보여주셨어도 7개의
표적을 보여주셨어도 오병유의 기적을 그들에게 경험을 하게 해도 너는 몰라요 사람이 깨닫는다라고 하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들은 a는 b입니다. 딱 숟가락을 떠서 먹여주면 그렇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고요 a는 b입니다라고 말해도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데 왜 a를 비니까라고 의문을 갖는 분도 있죠.
그것은 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니라 생각 구조의 차이예요.
어떤 사람은 그냥 남이 정이 해준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게 편한 사람이 있고 본인이 이성적인 작업을 해서 어떤 납득이 되어야만 힘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를 원했던 거죠.
그래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공자나 또 장자나 모든 사람들도 신 존재를 알기를 원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중세까지 군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실은 누구인가 그 학문이었어요.
이성주의 학문이 들어오면서부터 신이 누구인가라고 하는 그 질문이
이제 인간의 이성이 신의 그 자리를 차지해서 신는 어떻습니까라고 정의해 주면 그 신을 믿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그다음부터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면 좋습니다.
근데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어떤 고대부터 중세부터 계속 내려왔던 하나의 원칙 그것이 말씀의 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성이
신적인 권위를 능가하는 시대를 지나고 난 이후부터 사람들은 과학적인 것이라든지 이성적인 거라든지 철학적인 것들을 굉장히 탐색을 했죠.
근데 결과는 뭐였어요.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가져오게 되죠.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요. 인간의 이선 인간의 과학 합리적인 사고 자체가
유토피아는 아니구나 절대 선은 아니구나 그래서 다시 복음주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라는 복음주의가 시작되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주의 시대에 지금 살고 있는 거죠.
그러나 여전히 이성과 어떤 하나님에 의한 존재에 대한 알 그 앎의 차원이 부딪히고 있습니다.
아무리 전쟁이 있고 아무리 과학적인 그런 피패를 보더라도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여전히 살아있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도마나 빌립도 똑같이 인간의 이성을 대변하고 있는 모습과도 같아요.
그리고 나서 이제 6번에 보면 빌립과의 대화에 이어 3일째 하나님을 설명하셨다.
이때 이제 예수님께서 또 다른 이슈 하나를 꺼냈습니다.
이게 뭐냐면 그래 나는 떠날 거야 그런데 너희에게 남아 있는 너희에게 줄 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야 그런데 그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과
나와 성령 하나님은 일심동체야 하나야 3위를 가지고 계시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셔야 여러분 우리는 삼위 일체 개념을 신학자들이 정리해줘서 알고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삼일체 개념을 그들이 이해했을까요.
절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이다라고 하는 그것도 이해가 안 됐었고요
그리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요 더더군다나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한 인격을 가지고 계시고 사위를 가지고 이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직 예수님이 하시는 말에 100분의 1 천분의 1 만 분의 1도 지금 이해를 못하고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에 그냥 의문점을 두고 따라오기에 급급했던 거죠.
1번 그러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의 관계를 보십시오 여러분 세상의 종교는요 이런 원리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불교는 해탈이에요. 해탈이 저희가 하는 cp에서는 뭘 하냐면 이제 우리 무식의 세계를 알아보는 그런 이제 훈련을 하게 되는데요.
이제
우리는 의식의 세계가 있고 무의식의 세계가 있어요.
근데 무의식의 세계는 의식이 항상 이렇게 컨트롤 하기 때문에 무의식의 세계를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무의식의 세계를 최초로 이제 학문적으로 했던 사람이 이제 로이드 n이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근데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무식의 세계를 보이는 세계를 이렇게 가시화시켰던 아주 대단한 학자이죠.
프레이드는 조금 무신론이기도 하고 융은
아버지가 목사이기도 했기 때문에 우리는 호레보다 유물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마는 사람들이 이제 명상 영상은 아니지만 어떤 내 마음에 있는 어떤 우식의 이미지를 끌어올리게 되면 가장 거부를 보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면 불교에 있는 사람들이 그걸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불교는 명상이나 어떤
조용히 무식을 떠올리게 되면 뭔가를 생각하고 사고를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그냥 신일 합일이에요.
신일 합일이라는 게 뭐냐면 어떤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서 자신의 생각을 다 이렇게 딱 포함해 버리는 그런 원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가 내게 무엇을 주시는지를 끊임없이 끊임없이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묵상은 뭐예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어울리잖아요. 하나님 말씀이 이렇습니다.
이렇습니다라고 계속해서 묵상을 할 때 머릿속으로 사고를 합니다.
그런데 불교는요 해탈이에요. 그냥 모아 지경이에요.
남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절대자가 내 생각을 딱 잡아버리는 거예요.
내 생각과 의지를 절대자가 가져가 주시는 거예요.
나는 그냥 무아지경에 있는 상태가 되어주면 가장 평온한 상태예요.
그런 사람들에게 뭘 떠올리라 생각하라 이러면 굉장히 많은 저항이 일어납니다.
근데 예수님은 어때요 하나님과 하나이시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딱히 이렇게 포함하지는 않아요.
우리는 어때요 하나님이 계시지만 나의 생각이 있어서 이 두 생각이 딱 맞아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하나님 말씀이 내게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우리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이렇게 묵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크기도 하게 되고 의뢰를 받기도 하고 그 안에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사실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불교적인 용어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삶에 적용해서 뭔가를 이거구나라고 하는 게 깨달음이라는데 이상하게 불교에서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쓰니까 깨달음을 하면 안 된다 하지만
그 용어도 하나님이 만드신 용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제 알아차리는 거죠.
그러니까 이방 종교는요 꼭 이렇습니다.
근데 3일 일체 하나님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이 하나요.
그래서 그렇지만 각 지체가 각 미가 따로따로 존재하고 계신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시 그들의 개념으로는 이 신일 합일이 이루어져야 완벽한 선이다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이 따로따로 있다.
이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다 아이엠 히 이 개념 나는 그다음 아이엠 히 이 개념이 그들의 사고로는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것이죠.
여러분 지금 어떤 사람이 갑자기 와갖고 나는 메시아야 나는 하나님이야라고 누가 이야기한다면 여러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받들릴 수 없겠죠. 그때 당시 성으로 우리가 돌아가 본다면 충분히 그들의 생각을 이해를 할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의 마을과 아세라 이게 있죠.
이게 뭐냐면 신과의 합일로 그들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신과의 합일 그러니까 인간이 어떻게 신과 합일이 되냐 나의 정체성은 없다라는 거야 나의 정체성은 없다는
근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뭐라고 그러냐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어떤 객체를 가지고 그 사역을 이루고 가신다 이렇게 말씀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세상은 범신론 굉장한 많은 그런 다양한 신 안에서 하늘을 찾으려고 했었고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따로따로의 사역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원일적으로는 하나이다.
이 개념을 그들은 이해를 못했다는 거죠.
2번 봅시다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 다락방 광론의 가장 큰 주제는 떠남이었습니다.
떠남 감낭상 논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마지막 결론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고 제가 지난번에
굉장히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이유가 그거예요.
구약적인 그 하나님의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말씀과 연결되어져서 하나님의 사랑 인간 사랑으로 비교되어지는 또 그리드 커멘드 지상태 사면 그것까지 제가 이끌어냈고요 지금 이
지금 다락방 당론 이 안에서는 권왕이라고 하는 주제가 굉장히 큰 주제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장소를 일단 무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4장 말씀해 보십시오 요한복음 14장
보십시오 25절에 보면 오예사 성령에 대한 생각을 말씀을 하시고요 15장에 가보면 뭡니까 나는 포도나무 이 주제를 이어지고 있다라는 겁니다.
성부 성자 연합을 지금 설명하신 이후에 성령 하나님의 출연하심을 이제 우리에게 소개를 해주고 있는데
이제 포도나무와 너희는 가지다라고 하는 이 개념을 말씀하고 포도나무가 있어요.
우리는 가지예요. 우리가 포도나무의 가지가 젖고침을 되면 어떻게 돼요.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어지는 거예요.
그러나 포도나무는 포도나무고 가 가진 거예요.
그렇죠 하나님이 나와 하나이기 때문에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그러나
우리가 접붙임을 당하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가신 후에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성부 성자 성령의 연관성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라는 거예요.
이렇게만 우리가 깨달으면 될 것 같아요.
다 함께 읽어봅시다
88페이지
김은아 집사님 한번 읽어보시겠어요. 다 함께 읽어봅시다 여기까지 수명하신 여기까지 설명하신 예수님의 말씀 쉽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죠 제자들에게만 하시는 각론이기 때문이라는 거 아시죠
성경 전체는 예수에 대해 기록한 책인데 여기서 그분 자신이 자신에 대해 이토록 깊이 파고 들어가셔서 설명하시니 어려울 수밖에 없죠.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진리와 대조해 봐야만 보이는 예수 진리임이 어려울 수밖에 없죠.
서양과 동양의 종교와 철학의 근간인 범신론 이신론과 비교해 아 보이는 정도니 어려울 수밖에 없죠.
또 그 정도 되어야 세계의 모든 종교와 사상과 철학을 상대화시키고 절대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겠죠.
어려워도 예수 믿는다는 것이 어떤 기초 위에 있는가를 알게 된다면 튼튼한 신앙이 될 겁니다.
예수님이 일어나시네요. 우리도 언능 일어나십시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신은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세요.
지금까지 다락방에 있었던 권랑요 우리가
그런데 이제 여기를 떠나자고 하십니다.
그럼 어디로 가자는 걸까요. 개슨만의 동산이에요.
담란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것 기억나시죠 그리고 그리로 향하여 가는 것에 아마 어느 포도 밭을 지나시게 된 듯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다시 그곳에 머물러 하신 강문이 포도나무 강문이랍니다.
포도나무 강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금 보면 범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신이 굉장히 많다라는 원리죠 이 범신론자들은 다양한 신을 인정을 합니다.
요즘 모든 사람들의 사고가 다양한 신을 인정을 해요.
그렇죠
그러나 아니죠. 유일신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유일신이에요.
이 신돈이라고 하는 게 뭐냐면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라고 하는 사실은 인정은 합니다마는 그다음에 인격적으로 인간과 1대 1의 개인적인 관계를 맺거나 또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 자체는 인정을 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창조해놓고 그냥 자연 발생적으로
어떤 진화를 거쳐 인류가 계속 발전해 간다라고 하는 사상을 믿는 게 이식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적인 사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어요.
범신론 다신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다른 신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수공품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끊임없이 성령을 보내셔서
이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도록 안내하시고 곁에서 돕는 파바플레토스 옆에서 돕는 자 곁에서 돕는 자 성경을 통해서 인도하시죠 그렇죠 그래서 이러한 기초 우위에 세상을 보는 사람과 이러한 기초가 없이 세상을 보는 사람과는 정말 큰 차이가 있는 거
여러분 미신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때요 우리 하나님을 창조했다.
그러나 그다음 터는 진화론이냐 그 다음부터는 자연 발생적으로 이루어지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연히 이루어진다라는 사고에 동의를 하게 되죠.
정말 잘못된 그런 순환적인 그런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 방문을 시작하십니다.
1번 그러므로 안에 부하하거나 안에 구하라 인 크라이스트 우리가 신학교를 가게 되면 인 크라이스트의 개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개념을 우리가 확실히 잡지 않으면 이해할 수가 없어요.
성자 성령 하나님
이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상호 교류하세요.
그렇죠 저와 여러분들은 백체이지만 서로 상호 교류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강론을 다 마치신 이후에 포도나무 비율을 말씀하시는데 예수 그리 누구인가 이것을 깨달았던 제자들은 그러므로 내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들은 생각을
그냥 했을 거예요. 그러면 열매는 당연히 열리게 되어 있는 거죠.
여러분 사실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었을까요.
그리스도의 접부좀을 받은 것일까요. 회의적입니다.
마태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한 해가 되었다라고 볼 수가 없어요.
그러나 언제 하나가 됩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비로소 그 가르침의 사역을 완성을 하셔요 너희는 모든 민족으로 제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를 주고 내가 내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 28장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어떤 기적을 베푸시고
그리고 많은 신의 사역도 담당을 하셨죠.
그러나 가르치는 사역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서야 최초로 그들에게 꺼내주십니다.
왜냐하면 그전까지는 그들의 몰리 이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몰리 이해 때문에 아무리 가르쳐도 그들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너희는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그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 그들은 지금까지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모든 하시는 말씀이 다 연결 연결 연결되어져서 하나가 딱 완성이 되었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 순교의 재물을 자기 자신을 누렸을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비로소 가르침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러나 오늘 모든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 깨달을 수 있을까 아니요.
깨달을 수 없어요. 언제 깨달릴까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체험을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나를 위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를 위해 그리스도의 나를 작정하셨던 태초부터 나를 작정하셨던 그것이 이해가 될 때 그리스도의 제자가 비로소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온전한 헌신이 되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이해를 못했기 때문에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걸 다 알게 되면 할 수가 있는 2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의 배경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이야기하죠.
교회를 안 다닌 사람들은 그 아멘 그리고 끝나버려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멘트의 소중함을 알지를 못해요.
왜냐면 그들 안에는 인 클라이스트 주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의미를 알지 못해요.
그냥 주문 정도로만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막 그러지 않아요.
부표님 예수님 신력님
이런 소리나 하고 있죠 주문이에요. 주문 그들이 생각하는 이에는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죠.
너희는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고 너는 아버지께 구하라 나는 떠난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은혜입니다.
14장 13절 14장 14절 요한복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 아 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주님이 주에 행하신다 요한복음 15장 7절 요한복음 15장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내 안에 거하면 니가 무엇인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러면 이루신다 뭐가 전제돼 있어요.
임 클라이스트 그렇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안 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크라스타는 개념은 제자들도 이때 당신을 알지 못했어요.
여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해야 됩니다.
우리도 전국에 지금 수천의 어떤 목사님은 부활 부활 맨날 그러잖아요.
그죠 부활 부활에서 부활의 이 사건을 이해해야 된다라고 하지만 그들이 강조한 건 뭐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 여러분 부활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전제되기 때문에 부활이 의미가 있는 그런데 그들은 죽음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보화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 형평성 어떤 공정성 균형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요즘 이단들이 많아지는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 말씀에 기력을 잡아야 되는 게 어느 연마를 강조해요.
그러다 보면 사람들이 굉장히 독선에 빠집니다.
여러분 예원교회 거기도 마찬가지예요.
보금보금해서 보금보금하니까 복음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금보금하니까
복음적인 설교가 아니면 다 아니다 해서 기존 교회에 적응을 못해요.
그러다 보면 성도들을 굉장히 현혹시키는 겁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요즘 굉장히 많아요.
여러분 균형을 잡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를 강조하는 것은 여러분 굉장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3번 계속해서 약속을 더블 체크하시는 예수님 제자들에게 하시는 각론이 나는 떠난다
그러면 하니까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그러니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성령을 보내시겠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고 나서 포도 강돈 마치시고 너희는 가지니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라 하나님 성령을 보내주실 테니까 그리스도 안에만 붙어 있어 성정이 너희를 도와주실 거야 그러니까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다 함께 읽어봅시다 제자들에게 하시는 유언 강론
여기를 우리 기윤이가 한번 읽어주시겠어요.
없어 왜요 저 책이 없는데 딱 걸렸어 딱 걸렸어 그래도 듣는 게 어디니 그래도 듣는 게 어디야 그래도 지훈이는요 전혀 개의치 않아요.
귀여워 기운이 그냥 저런 모습이 좋아 없는데요.
일해야 돼요 사람이 고마워 기웅아 아 집사님 오늘 공부 열심히 하시는데 저녁에도 열심히 하시는군요.
제자들에게 한번 읽어주세요.
요한복음 14장 16절 말씀 볼게요 요한복음 14장 16절 아까 우리가 읽었죠.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유사를 너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으니라 25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거니 하였거니와 26절 오회사 곧 하나님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가르치고 그렇죠 생각나게 하리라 마태복음의 28장에 나와 있는 이 가르침의 내용을 요한복음에는
가르치는 내용이 26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요한은 뭐예요. 마태보다 요한은 훨씬 더 오래 살았잖아요.
그렇죠 요한은 마태가 죽은 다음에 꽤 오랫동안을 살아서 마지막 순교자가 되어서 예수님의 이러한 모든 전반적인 사역과 그의 가르침을 다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가르치는 이 부분까지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부 하나님이 성자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게 된다.
그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성령이 깨닫게 하시고 또 생각나게 해 주시겠다.
여러분 조금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뭔가 생각이 잘 안 나 그렇죠
뭔가 하고 싶은데 떠올리지가 않아요.
그러면 성령님께 기도하세요. 성령님 내가 뭔가에 사로잡혀서 잘 떠올리지 않고 생각나지 않는데 성령께서 생각나게 해달라고 여러분 그 기도 중에 항상 성령님을 초청하는 기도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귀신을 초청하면 귀신이 와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분신 사범행을 하면 귀신이 저 오고요 악몽 자꾸 꾸는 사람 그렇죠
귀신 영화 자꾸 보는 사람 하면 자꾸 내 마음속에 악한 영이 막 들어옵니다.
막 갑자기 막 죽는 꿈 보죠 갑자기 막 이상한 사람 나타났고 나를 죽이는 꿈도 꾸고이 런 꿈을 꾸는 것은 내 마음속에 뭔가 불안하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불안할 때 성령님을 여러분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튼 꿈을 분석하면 그러한 부분이 있어요.
근데 내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 마음이 불안하다 그러면 평상시에 안 꾸던 꿈도 꾸게 되고 평상시에 우리가 안 보였던 사람도 보여주게 되고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서 내가 죽고 지난번에 우리 어떤 우리 자녀 중에 하나가 갑자기 자기가 높은 데 올라가서 떨어져 죽는 꿈을 꿨다.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럼 저는 알잖아요.
얘가 지금 뭔가 불안하고 있구나 뭔가 심리적으로 불안하거나 또는 불안한 점을 찾아서 조금 제가 불안함을 희석시키는 그런 작업을 해줘야 되겠죠.
그런 꿈을 꿨다고 자식아 가는 거는 개꿈이야 지나버려 그 불안함을 건드리지 못하는 거죠.
불안하면 죽는 여러분 갑자기 자살하면 그렇습니다.
성령님을 계속 찾으셔야 돼요
얼마나 좋아요. 성경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게 그렇죠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내 오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에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도 있었으므로 증언하니라 16장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상을 말하느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위기라
내가 따라가지 아니하며 보여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오 하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느라 주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우리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나를 다시 나를 보지 못하며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내가 지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 여기 밑줄 쫙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 가르쳐 주신
대학 교수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학생들이 책 한 권 읽고 두 번 읽으면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수에게 자신의 지식을 막 늘어놓죠 그러나 교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더 이상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알려줘도 잘 모르기 때문에요.
근데 우리가 안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어느 한 면만을 보면
우리가 안다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한쪽을 보고 그다음 방대편을 보고 그래야 우리가 완전히 안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보수 신앙을 우리가 공부를 했다면 보수 신앙만 공부하면 안다라고 말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그 반대편의 신학도 공부를 해야 그걸 통합해서 이쪽과 이쪽을 견주어서 이러한 것이 있지만 이게 옳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근데 보수 신학을 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공격을 당하는 이유가 뭐냐면 그들은 무지하다라는 거예요.
모르기 때문에 그냥 이게 정답이다라고 말해버리기 때문에 이게 법이다라고 말해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추론과 어떤 유추가 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도 이제 보수 신학을 공부를 했고 이제 해골에서는
연대 연대 신학 졸업하시는 교수님 밑에서 공부를 해봤어요.
그리고 제가 학교 단에서도 사역을 해보았기 때문에 저는 하나의 교단 보수 교단의 저의 정체성은 거기에 있지만 타 교단이 이야기하는 그런 신학들 타 교단이 이야기하는 어떤 각도들을 많이 접할 기회가 생겼었어요.
그리고 나서 내가 결론이 뭐냐면 나는 보수예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성경의 절대 무어의 말씀 이거를 나는 선택을 하는 거죠.
그때 제가 뭐 성별이나 어떤 감리교나 또 다른 교파의 목사님들과 계속 식사하면서 논쟁을 했던 게 있어요.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는 게 구속사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것은 구속사를 100% 다 인정을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성경의 구속사가
해결되지 않는 그 부분이 있거든요. 그 소사는 뭐냐하면 창세기 1장부터 창세기 11장까지는 원적사잖아요.
그 부분은 소속사가 포함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죠 속상한 게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지는 그것을 증명하는 게 구속사예요.
그래서 구약을 봐도 예수 그리스도 신약을 봐도 예수 그리도인데 그들이 말하는 구약의 원 역사는 그것을
소속사의 개념이 완전하게 100% 다 들어가 있지가 않아요.
그래서 그들은 그걸 자꾸 공격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통합해도 그들은 소속사가 성경을 보는 가장 탁월한 원리이다라고 인정을 합니다.
그들도 그러나 우리는 뭐냐 하면 그 부분도 포함되지 않는 영역이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이걸 모르고 나서 하면 논리 위반에 빠지게 되죠.
그러다 보니까 알아야 하는 겁니다. 성경을 공부해도요 여러분 아셔야 돼요 여러 차원의 각도를 우리가 다 아셔야 됩니다.
제가 보수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 스타 복음서를 공부하고 또 진보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사복음서를 공부하면서 그리고 내가 지금 여러분 가르키는 거 뭐냐면 다 보수에서
기반하는 그런 가르침을 제가 여러분께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여러분 이해를 하셔야 돼요 여러분 보수 신학이 정말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진보주의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너무 열이 받는 게 안 먹는데요.
갑자기 화가 나서고 독일에서 바로 이제 와서 우리한테 특강을 하시는 교수가 있었는데 나이는 저와 비슷했던 사람인데
초국이 있냐 이 있냐 이런 식으로 저 따져 묻더라고요 그래서 막 열이 받아서 그런 기억이 그러나 결론은 뭐냐 하면 알아야 합니다.
모르고 안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안다라고 하면 이면 저면을 다 봐야 합니다.
케리 진도 나가라고 그래요 사모님이 쓸데없는 4번 역시
떠남이라는 주제로 끝나는 포도나무 강 여기를 사모님 걸로 한번 읽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각론을 마무리하는 디에세서서 또 기도 요한복음 10장
이걸 우리가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육적인 마음 하나님은 신이었지만 지금 사모님이 울컥하신 건 뭐냐면 신이었지만 인간이 느껴야 할 어떤 감정 그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라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보스와 같은 존재였어요.
그분이 떠나시면서
뒤를 봐주는 그런 기도를 하고 있다라고 보면 돼요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좋다.
나쁘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마지막 자살을 하잖아요.
자살은 성경적으로 우리가 해석을 할 수는 없는 것 같고요 지금은 그런데 그가 마지막에 자살을 했던 이유가 뭐냐면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었던 선물이라고 저는 정의를 내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 검찰 조사가 막 시작되어질 때 자신이 희생을 함으로 자신과 함께 이 길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어떠한 범죄함을 물을 수 없음.
공소권 없음이라고 끝나버리고 그들을 지켜주었던 그런 죽음이었다라고 저는 봐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남아 있는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뭔가 그들에게 선물을 주시고자 하는 대제사장적 기도다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여러분 그 어머니가 먼 길을 떠날 때 집에다가 곰국 끓여놓고 가시잖아요.
다 말아 찜통에다가 봄 한사발 통 끌어놓으시고 먼 길 가죠.
사실 멀리 떠난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내가 없어도 너희는 이 북으로 계속 식사를 하라라고 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거죠.
떠나 쉬면서 남겨놓은 그런 제자들 또 제자들과 함께 그들이 정말 힘든 여정들을 경험해야 할 그 상황 속에 대제사장적 기도를 남기시고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 그런데 그 기도회에서는 뭐가 있냐 자신을 위한 기도가 있었고요 그 다음에 제자를 위한 기도가 있었고요 그다음에 제자들을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따르는 무리들을 위한 기도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 기도 안에는 자신을 위한 기도도 있지만 예수님은
제자를 위한 기도 또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 또 곧 우리를 위한 오늘날 우리를 위한 기도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그 기도의 내용은 감남산에서 하셨던 말씀 그다음에 다락방에서 하셨던 말씀 그리고 포도원 포도밭에서 하셨던 그 말은 이게 다 떨어진 게 아니라 전체를 다 아우를 수 있는 전체를 다
포함할 수 있는 그런 기도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마지막 기도를 해주잖아요.
그러면 그 기도의 내용에는 그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를 거기에 다 적용해서 기도를 해주거든요.
근데 나눴던 대화 따로 기도 따로 해버리면 그게 문제가 돼요.
공감이 안 되죠 그러나 나눴던 이야기를 기도 속에 다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서 기도로 마무리를 지어주면
기도를 받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이 있을까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구나 나의 아픔을 그 기도에 잘 포함시켜 주셨구나 그래서 엄청난 많은 감동을 느끼게 되죠.
저희도 어떤 신방을 하다가 마지막 기도해 줄 때는 항상 기억하는 게 뭐냐면 그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를 다 기억하고 있다가 그것을 기도로 풀어서 짧게 요약해서 제가 기도를 해줍니다.
제가 이런 생각이 없을 때는
그냥 내가 그냥 설교 준비했던 거 내가 설교 준비했던 것만을 딱 요약해서 기도를 해요.
그러면 기도 따로 그 사람 고통 따로 오죠.
출동 소개 안 하겠습니다. 넘어갈게요 다 함께 읽어봅시다 김정일 김성훈 집사님 한번 읽어주시겠어요.
이렇게 마무리 이렇게 마무리 기도까지 하시고는 기도로 시내를 건너 개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거기 가서 우리도 기도하자 아마 그러셨던 것 같아요.
우리도 함께 개세마의 동산으로 쫓아가십시다
제자들에게 유언 강의를 하신 후 기도 시간을 가지시는 모습을 보세요.
그러나 제자들은 피곤합니다. 우리 모습입니다.
세 번 동일한 말씀으로 죽기까지 순종하겠다는 기도를 하셨을 때 드디어 쿵쿵쿵쿵 저기 햇불이 보이면서 무장 병력들이 들이닥칩니다.
예수님이 드디어 체포당하십니다. 5번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내려가신 예수님이 방론하실 때 가로누다는 이미 밖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가야바 가록으로 붙었죠. 그리고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넘깁니다.
사실 그때 당시는 유월절 시기였기 때문에 디아스포리 유대인들이 상당히 많이 모아 모여 있었고 거기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도 누구인가 이 주제를 뛰어넘어 하나님은 나라 나는 하나님이다.
내가 곧 메시아다 이렇게 말해버리니까 그를 죽여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런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라고 생각했던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하나 너무 좋은 기회가 되었던 거죠.
그래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가롯 유다의
손에 피를 묻혀 예수를 죽일 아주 묘함을 갖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을 그때 강동이 다 끝날 쯤 게세마네 동산 쪽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고 그를 데려다가 이제 법정으로 데리고 갑니다.
1번 안나스 가야바 산내 드린 공유의 법정의 재판 과정 1 번 법정 질문의 요지 이 법정 질문의 요지가 뭘까요.
니가 누구냐라는 거죠. 너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왜냐면 그것에 그가 예수님이 인정을 해야 공소권이 유지가 될 수 있겠죠.
그리고 죄명을 신할 수가 있겠죠. 근데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서 쭉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리고 나서 감남사 각론의 핵심 중심이 뭐예요.
인자는 본능의 우편에 앉으신다
부름을 타고 다시 오리라 내가 하나님이라 이렇게 선고를 하고 있잖아요.
더 이상 본인이 자백을 했고 본인이 다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증인이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일부러 다 고백을 했기 때문에 결과는 사형입니다.
그래서 그때 밤샘 심문을 받고 사형을 받게 되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했더니 잘 됐다.
니가 나를 도와주는구나 너를 내가 죄목을 붙여야 되는데 그 죄목은 신성 모독죄다 이제 사형이다.
왜냐면 신성 모독은 당시에는 사형이었거든요.
보를 들어 바로 현장에서 직결 처분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마는 민심이 그들을 굉장히 두렵게 했던 거죠.
그래서 자기가 그것을 하게 되면 나중에 후폭풍이 굉장히 무서울 것 같아서
그것을 빌라도에게 넘기게 됩니다. 그게 언제예요.
밤에 빌라도에게 넘기는 거죠. 빌라도 쪽에 가보니까 이 가야바 이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넘긴 거예요.
그러니까 사법적으로 처리를 할 수 있는데 굉장히 문제가 되는 거죠.
왜냐하면 당신은 명절이 되면 그 명절에 죄의 수를 풀어주는
그런 특사 뭐라고 했죠. 우리 광복절 특사 있죠 그런 제도가 있었어요.
유대인 6월절 명절에는요 그러니까 그날 밤에 이 거사를 치르지 않으면 그다음 날 풀어주라라고 이야기가 되어지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되니까 아무튼 목요일 날 밤에 잡히셔서 금요일 죽게 되어지는데 그 밤 사이에 모든 것을 다
해결을 해야 될 상황이었습니다. 2번 예수님의 대답 안남삼 감설의 핵심 내용 인자는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다.
앉은 자다 이게 적어 송치예요. 인자는 권능의 우편에 앉은 자다 그러면 시편에 마태복음 22장 44절에 보면 마지막 화요 신앙 논쟁을 통해서
성전에 있는 신약자들을 완전히 굴복을 시키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영광이고 예수님은 다시 부름을 타고 우리에게 오실 것을 너희는 곱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뭐냐면 곧 나는 하나님이다.
제자들에게만 했던 말씀을 가지고 대제사장 그 일당들에게도 예수님이 다시 한 번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3번 법정 선고 신성 모독죄다 더 이상 증여도 필요 없다.
사형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 거죠.
다 함께 읽어봅시다 신은경 집사님 한번 읽어주시겠어요.
91페이지 멀찍이 따라와 이 과정을 보고 있던 베드로 컴컴한 어둠의 권세에 눌려 그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맙니다.
얼떨결에 슬쩍슬쩍 위험한 고비를 넘기듯 순간적인 상황 속에서
상황 속에 얼어버렸지만 갑자기 꽃기오 소리가 나자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목요일 밤 체포된 이후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새벽이 다가옵니다. 철야 신문이었습니다.
이번 유월절에는 예수님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유다가 나타나면서 갑자기 야밤 불법 재판을 강행한 것입니다.
품이진 골목 어디선가 얼굴을 묻고 통곡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는 어간에 3년을 추적해 왔던
일단의 검은 눈 그 대제사장 세력은 드디어 묘안을 찾아냅니다.
왜 우리가 우리 손으로 죽이냐 로마 법으로 죽이자 그 굿 아이디어야 그러자 금요일 아침이 밝아옵니다.
이번 로마 법정의 재판 과정 총독 앞에 서게 됩니다.
제가 신구약 중간사 그때 공부할 때 빌라도 총독이
파견되어 왔던 그 경로를 제가 말씀을 드렸죠.
당시는 유대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위쪽에 있었던 그쪽이 밀란이 일으키잖아요.
그래서 로마에서 총독을 파괴해서 빌라도가 거기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계획
군대를 거기다가 주둔시켜 놓고 밀란이 일어나면 그 로마 군대가 빨리 와서 밀란을 잠재우를 목적으로 당시 주 군대를 거기 지중해 근처에 두둔 시켜놓고 거기에 빌라도를 거기에다가 임시 통치자로 세워놨던 그런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지금 로마에 가서 이 사람을 압송해서 뭔가 재판을 받아야 되는데 파견되었던 빌라도 총독이 있으니까
잘 됐던 거죠. 가서그에게 심문을 받게 했던 겁니다.
법정 질문의 요지가 뭘까요. 니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이었습니다.
원고 측이 기안을 해서 재판관에게 올렸던 예수님의 죄가 뭐냐 하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서 자칭 왕 그리스도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실은 가이사라는 것은 가이사의 것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그렇게 해석을 한 거죠.
이번 예수님의 대답 니 말이 옳다.
네 말이 뭐죠
백성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부르고 또 예수님은 그때마다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말씀하십니다. 그래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인 왕이라기보다는 그들을 구원하실 왕이라는 개념으로 말했고 그러나 예수님은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내 나라가 있다. 하나님께 속한 나라
그 나라의 왕이다 라고 이야기했던 거죠.
내가 조선의 국모다 했던 그 누구죠 명성화무 명성황후가 마지막에 칼날 앞에서 나는 조선의 군보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알았지만 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을 통치하는 왕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거죠.
이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빌라도가 골치 아픈 거예요.
왜냐면 로마 당국의 원칙 하나가 뭐냐면 그들의 종교는 건드리지 말라는 거였어요.
유대인들은 아주 종교심이 투철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를 건들게 되면 민란이 일어날 것을 뻔히 그들이 알았기 때문에 절대로 종교에는 너희가
들리지 마라 개입도 하지 말고 만지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고 책금만 잘 걷게 해라 이게 로마의 정치였습니다.
우민화 정책 재미있게 해주고 잘 먹이고 잘 써주고 해서 그들을 좋은 나라에 살고 있는 백성이라고만 믿게 해줘라 그리고 종교를 인정해줘 왜냐면 어차피 로마 황제는 누가
건드릴 수 없는 독보적인 형제이니 그들의 어떤 민족적인 종교를 인정해 줘라 빌라도가 보니까 답답하거든요.
빌라도가 말하는 나라와 예수님이 말하는 나라는 분명 다른 나라인 것을 빌라도가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알았죠. 알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재판은 이건 답이 없는 재판이다.
사형 언도를 할 수 없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3번 빌라도의 해피
누가복음 23장 5절
노가봉 23장 5절에 보면 빌라도가 4절 빌 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뭐가 없다.
죄가 없다. 죄가 없다. 우리가 더욱 강렬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게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들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빌라도가 듣고 그가 할 일이 사람이냐 물어 헤롯이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때 헤롯이 예루살렘에게 있더라
그러니까 이 빌라도는 이 재판을 회피할 목적을 가지고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 얘기로 이 재판을 미루게 됩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 이 헤로에게 이 재판을 넘기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이 갈릴리로 가게 되면 여기서 3일길을 가야 돼요 그런데 지금 대제사장들은 그날 밤에
어때요 이것을 해치워야 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주 강행하게 되는 거죠.
압박을 하게 된 거죠. 6월절이기 때문에
그래서 빌라도는 할 수 없이 거기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다 함께 읽어봅시다 김은하 집사님 다시 한번 읽어주시겠어요.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데도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할 정도로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재판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승에 묶인 채로 헤롯의 관저로 끌려가십니다.
예수님은 피고 재수의 신분으로 이렇게 법정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 우리도 이제는 해로 관저로 가야 합니다.
마침 유월절이어서 해롯은 로마 지경 관할인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이송하는 로마 군인들의 뒷모습이 보이십니까 유월절 만찬 이후 다락방 강론 포도나무 강문을 기도로 마무리하시고 게센만의 동산에서 체포된 이후 밤새도록 철라신문당하셨기 때문에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보이십니까
예수님은 사실 지금 억울하십니다. 자존심 상하십니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예수님은 저렇게 당하고 계신 겁니까 지금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지금 빌라도 총독이 해롯이 있는 그 갈릴리까지 가기에는 3일이 걸릴 건데 마침
예루살렘 유월절이어서 해로시 로마 지경에 있는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죠 3번 갈릴리 분모와 헤로스의 재판 과정 그래서 헤로도 그 과정에 참여하게 됩니다.
23장 23절 누가 봉 23장 8절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랬던 염고로라 여러 말로 모르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헤노시크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없신 여기며 희롱하고 빌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아보내니 헤로시 빌라드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12절 보십시오
해롭과 빌라도 충덕은 뭐예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어떤 이권 앞에 마음을 하나로 맞추는 그런 상황인 거죠.
이것은 정치적인 그런 어떤 이권 때문에 그들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던 그런 상황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데이 제사장의 그룹에 동일한 고소를 들었던 헤롯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묵비권을 행사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지금 해럿은 뭘 보기를 원했어요.
예수님의 이적을 보길 원했던 거죠. 마침 잘 봤네 잘 왔네 이 사람이 그렇게 이적을 행하던 청년 예수인가 예수님이 그걸 알았던 거죠.
그래서 그에게는 어떠한 것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에게
어떠한 자신의 신적 권위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단 일도 없었던 거죠.
그래서 다시 빌라도에게 재판권을 넘겨버립니다.
헤롯은 어떤 상황에 자신의 목적을 다 이루지는 못하고 다시 넘겨 드림을 받죠.
4번 빌라도의 로마 법정의 최종 판결 누가복음 23장 13절부터 쭉 나와 있습니다.
빌라도가 대 재산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허나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 죄를 짓지 못하였고 헤르시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더러 보내었노라 허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을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없음.
니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옥시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어 하니 이 바라보는 성중에서 일어나 밀란과 사늘로 말미암 옥에 갇힌 자르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를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받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받게 하소서 하는지라 벨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을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로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 소리로 재쳐가 십자가에 목 받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빌라도가 그들에게 구하는 대로 하길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밀란과 산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고 예수를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참 민중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예요.
빌라도가 총독이지만 민중이 그것을 원하니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허용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들
왜 대 제사장의 무리에 밀란이 이러는 것처럼 선동하고 빌라도가 왜 소신을 펴지 못했을까요.
이것은 정치적인 거와 똑같죠. 대제사장 그룹이 밀란 민중들과 결탁해서 반란을 일으킬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빌라도 총독은 자신의 입지도 안정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당시 대제사장의 이야기에
무게가 실어지게 될 수밖에 없었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지 아니하면 안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이게 상황이 상황 논리 상황 상황을 이끌어가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상황을 이끌어가는 건 참 조심해야 됩니다.
어떤 상황 이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집단 역동이 발생하는 거예요.
집단 역동이라고 하는 것은 내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집단이 어떤 생각을 동조를 하게 되면 나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그 생각을 이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거죠.
대제사장들도 사실은 예수가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겠죠.
아니 예수가 죄가 있다라고 믿었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 예수님을 환호했던 그런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떤 정치적인 예수를 그들이 지향했지만 그것을 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그를 죽이는 게 낫겠다라고 생각을 했던 거죠.
5번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시고 무덤에 장사됩니다.
보통 우리가 십자가는 가로 십자가를 메고 올라갑니다.
우리가 보통 십자가를 이렇게 메고 올라가는 게 아니에요.
보통 십자가는 바로 십자가만을 메고 올라갑니다.
원래 쪽으로는요
십자가 틀이 아니에요. 바로 십자가를 들고 이렇게 이렇게 올라가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 채찍질을 하게 되고 사실은 사형 언도를 내린 다음부터는 죄수를 때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형 이 십자가의 이 사형이 너무 고통스러운 그런 형벌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형을 언도받는 사람에게는 자비가 주어졌던 거죠.
그런데 엄청난 그런 매와 엄청난 고문이 가해지게 된 거죠.
그것은 대제사장과 많은 백성들의 어떤 분노 그런 분노가 그런 고문과 실직질로 나타났다라고 하는 거죠.
십자가의 무게는 한 70kg 정도 됐다고 그래요 예수님께서 몇 kg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 70kg를
어깨에 메고 골고다 없는 덕을 올라가신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극히 힘든 그런 상황이었겠죠.
근데 그 올라가는 상황 속에 로마 군병들의 조롱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침백등 이런 것들이 동반되었던 상황이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님은 극도의 고통을
경험을 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라는 거죠.
마무리 이영아 집사님 잠깐 읽어주시겠어요.
예수